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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들의 상흔 -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inspirit941 2018. 8. 19.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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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건축’ 책에서 호평한 국내 건축물 중 하나가 바로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었다. 홍대입구 근처의 작은 가정집을 리노베이션 해 만든 건물로, 와이즈건축의 젊은 건축가 장영철, 전숙희 부부의 작품이라고 한다. (교양 건축, p41) 보통 박물관은 크고 넒은 건물에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형태를 떠올리기 쉬운데, 이곳은 벽에 걸려 있는 작은 푯말과 건물 입구의 작은 간판만이 박물관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을 뿐이었다.



입구로 가는 길.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입구.



입구에 들어서 왼쪽 철문을 열고 박물관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바닥의 쇄석이다. 걸을 때마다 들리는 쇄석의 파찰음은 뒷부분에 배경으로 깔리는 거친 발소리와 합쳐진다. 왼쪽 외벽에 그려진 검은 소녀 실루엣에는 꽃가지가 그려져 있고, 오른쪽의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현재 얼굴과 손바닥을 본뜬 조각이 대비된다. 길을 따라서 지하로 내려가도록 동선이 짜여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관람객에게 무겁고 숙연한 기분을 준다.

뒤에서 들리는 거친 발소리는 위압감을 주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서지는 쇄석 소리를 들으며, 왼쪽에 그려진 소녀들의 검은 실루엣이 보는 방향을 따라 어두운 지하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왼쪽의 검은 소녀의 모습과 대비되는, 오른쪽 벽면에 있는 피해자분들의 현재 얼굴과 손 조각은 이 모든 어두움을 온몸으로 겪은 사람들의 자취인 셈이다. 찡그린 얼굴과 손에 깊게 패인 주름에서 먹먹함이 느껴진다. 걸어서 지하로, 어둠 속으로 내려가는 동선이 비극적인 느낌을 심화시킨다.




박물관 맨 처음에 마주하게 되는 쇄석길. 사진출처: 서울경제 - http://www.sedaily.com/NewsView/1OHEFHCIYY



오른쪽 벽면에 있는 피해자분들의 조각상. 출처: 데일리굿뉴스 http://www.goodnews1.com/news/news_view.asp?seq=62657



지하를 내려가면,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처음으로 밝혔던 김학순 할머니의 당시 영상이 눈앞에 있다. 왼쪽에는 당시 중국에 설치되었던 위안부 건물이나 일본 측에서 발견된 위안부 관련 서류들이 벽면에 사진 형태로 붙어 있고, 뒤돌아보면 전쟁 폐허의 일부분처럼 보이는 흙더미가 있다. 뒤에 전쟁 폐허를 둔 채로 할머니의 인터뷰 영상을 보면서 과거의 아픈 역사와 현재의 상흔을 돌아볼 수 있다.
  
지하를 벗어나면 다음 전시관인 2층으로 이동하는 계단이 있다. 계단의 벽은 진흙빛 벽돌로 구성돼 있고, 벽돌 곳곳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이 담겨 있다. 지하에 가까운 계단은 ‘그걸 다 기억하고 살았으면 아마 살지 못했을 겁니다’와 같은 절규가 담겨 있지만, 2층으로 올라갈수록 ‘나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여성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어요’라는 호소와 희망으로 논조가 변해간다. 어두운 지하에서 햇빛이 비치는 지상으로 걸어 올라갈수록 메시지의 논조가 밝아지는 구성이었다.


지하 2층에서 지상 2층으로 넘어가는 벽돌 계단의 일부. 출처 : flicker의 Dong-Jin Lee님



2층에는 ‘위안부’ 소녀상의 모습과 함께 ‘박물관 본연의 기능’인 역사적 자료 보관 / 서술 위주로 구성돼 있지만, 피해자들을 기리는 독특한 공간이 있다. ‘위안부’ 피해자분들 중 돌아가신 분들을 기리는 장소였는데, 아마도 가정집 베란다를 개조한 게 아닐까 싶다. 베란다 앞이 검은 벽돌로 이루어진 벽으로 막혀 있는데, 검은 벽돌 한 칸 한칸에 피해자분들의 사진, 이름, 사망일자가 쓰여 있다. 아직 베란다 전체가 검은 벽돌로 꽉 차 있지는 않지만, 피해자분들이 세상을 떠나실 때마다 벽돌이 하나씩 추가된다고 한다. 벽돌이 추가될수록 2층에 들어오는 햇살이 점점 적어지는 구조다. 이미 검은 벽돌이 많이 쌓여 있었고, 아마 언젠가는 이 공간이 검은 벽으로 둘러싸이게 될 것이다.


2층에 있는 추모형 검은 벽돌방. 사진출처: 서울경제 - http://www.sedaily.com/NewsView/1OHEFHCIYY


2층 관람을 마치고 1층으로 내려오면 가정집 마당이었던 공간이 있다. 햇빛이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곳이고, 앉아서 이야기나눌 수 있는 의자들도 여럿 있다. 한쪽 구석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데, 이곳에는 ‘우리가 해방을 안겨야 할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에게 인권유린을 당한 베트남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1층 마당에 있던 동상.


건축가의 세심하고 절묘한 설계가 만들어내는 경험 때문에라도 가볼 만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예산 문제 때문에 큰 박물관을 쓰지 못하고 서울의 한 가정집을 활용한 곳이라고 하는데, 작고 좁은 가정집이라는 특성을 정말 잘 활용해냈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 만들어내는 압박감이나 2층의 검은 벽돌이 주는 무게감은 역사적 사실의 나열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감정을 제공한다. 그렇다고 해서 피해자분들의 아픔을 전면에 내세우거나 일본의 만행을 부각하는 식으로 감정에 호소하는 건물도 아니다. 슬픈 이야기를 담담히 전할 때 더 큰 슬픔이 느껴질 때가 있듯, 이 박물관과 건축물도 아픈 역사를 담담히, 그래서 더 안타까운 느낌이 들도록 전달한다.




인상적이었던 역사적 사실이 두 가지 있었다. 한 국가가 여성의 인권 유린에 조직적으로 개입하고 위안부 설치 및 관리를 주도한 사례는 2차 세계대전 때의 일본이 유일하다. 물론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이나 중국, 유럽에서도 군부대 근처에 위안부를 설치하려고 시도한 사례는 있었으나, ‘군 당국’에 의해 제지되거나 철폐되었다고 한다. 전쟁 중에 여성이나 어린이의 인권이 유린당했던 사례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계속 있어왔지만, 국가 차원에서 이를 조직적으로 운영하거나 장려하는 식의 행태는 역사적으로 한 번도 없었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만행 역시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한국의 책임이지만,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을 정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자행했거나 운영했다는 증언이나 증거는 없었다. 그렇다 해도 피해자들의 상처를 위로하고 사죄하는 것은 국가가 자국민을 대표해 해야 하는 것이기에, 한국 정부도 김대중 정권 들어 사과를 표했다.
  
안타까운 점은, 일본 측에서는 오랜 시간동안 위안부 문제가 정부와 관련이 없다고 발뺌해 왔다는 사실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에 제기한 행정소송은 대부분 패소로 결론이 났고, 증거가 명백히 밝혀지고 증언이 나온 상황에서도 미온적인 대응으로 일관해 왔다. 유일하게 승소한 재판인 ‘시모노세키’ 재판에서도 일본의 책임을 100% 인정하지 않았다고.
  
다른 하나는, 일본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가한 고통을 한국이 참 오랜 시간 방치했다는 사실이다. 알고도 방치한 건지, 몰라서 오랜 시간을 흘려보냈는지는 박물관에서 알려주는 정보만으로는 알 수 없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 삶을 보내던 시간이 일본에게 당한 고통 못지않게 고통스러웠다고 감히 추측할 수 있었다.
  
박물관 2층을 보면 피해자분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해방 이후의 삶을 연도별로 서술한 방이 있다. 6 25 전쟁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다시 고통받은 분들도 있지만, 그 다음 삶조차도 순탄하지 않았다. 불임 때문에 남편에게 다른 가임기 여자를 소개한 사람, 결혼해 낳은 아이가 정신병 증세가 있기에 병원에 찾아갔는데 ‘매독에 걸린 상태로 임신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증상 중 하나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 학교 선생까지 키웠던 조카에게 ‘위안부 피해자 신고’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까지. 이분들이 살아오면서 겪어야 했던 고초는 일본의 만행이 남긴 상처에 비해 조명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만행에 고초를 겪은 4~5년의 시간은 해방 이후 약 40년간 한국에서 위로받기는커녕 한국에 의해 또 다른 생채기를 남긴 셈이다. 일본이 남긴 상처는 일본에게서 사죄받아야 하지만, 그 상처가 아물지 못한 채 40년이나 더 안고 살아야 했던 슬픔은 누가 사죄해야 하는 걸까. 그 아픔을 끝까지 안고 스러져 2층에 검은 벽돌로 남은 분들에게는 누가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싶었다.


박물관을 나서 돌아가는 길에 노란 나비를 가까이서 찍은 사진. 사람들의 정성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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