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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줄요약 독서

걸그룹 경제학

inspirit941 2018. 1. 31.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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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31


‘걸그룹’과 ‘경제학’을 엮어내고자 했던 정치부 기자의 부족한 시도.

아이돌 시장에 대한 통찰도, 경제학 지식의 깊이도, 데이터 리터러시도, 심지어는 논리적 개연성도 부족한 책.

제목과 부제, 추천사에 주는 기대감에 비해 내용이 너무나도 부실하다.


경제학 기초지식을 가볍게 쌓고 싶다면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가 훨씬 낫다. 역사, 고전, 문학을 경제학과 엮어냈다. 논리적 비약이 없진 않지만 이 책 ‘걸그룹 경제학’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다.




‘행복의 기원’, ‘상상하지 말라’, ‘여기에 당신의 욕망이 있다’에 이어 ‘트렌드코리아’에 이르기까지, 이 책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부분은 인간의 욕망이다.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소비가 유지되려면 ‘효용’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게 당신에게 필요해!’라는 걸 말하기엔,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거 없이도 지금까지 잘 살았는데?’라고 대답하기 때문이다. 이성을 일깨우기보다는 감정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 사람들의 내밀한 욕망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관점에서 ‘아이돌 시장’은 흥미로운 곳이다. 아이돌 시장에서 일어나는 소비는 ‘합리적이고 실용적’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애착, 친밀감, 멋지고 쿨함에 대한 동경, 자기투영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아이돌을 좋아하며, 아이돌과 관련된 모든 시장 - 음악, 공연, 굿즈, 영화, 드라마, 광고 등 -을 이끌어가는 핵심은 ‘이성’보다는 감정이고, 느낌이라고 봤다.
  
그렇기에 나는 ‘걸그룹의 흥망성쇠를 읽으면 세상을 움직이는 경제의 흐름이 보인다’는 거창한 부제에 혹했고, ‘취향의 시대, 그들은 어떻게 한순간에 시장을 장악했을까’라는 뒷부분의 질문도 흥미로웠다. ‘희소성, 소장욕, 충성도를 자극하여 소비자를 움직이는 사회경제법칙 31’이라는 설명도, 다음소프트 송길영 부사장의 추천사와 유호진 전 KBS 1박2일 PD의추천사도 이 책이 독특한 관점에서 쓰여졌을 거라 기대하게 만들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책은 부제에 아무것도 답하지 못한다.  
데이터 활용은 엉성하고, 걸그룹 시장 분석은 조악하며, 경제학 지식은 낡았다. 걸그룹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회현상, 정치현상을 꼭 소개하며, 그마저도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걸그룹 경제학'이라는 제목에서 경제학까지는 납득할 수 있어도, 정치 관련 내용이 절반 가까이 되는 걸 기대하고 보는 사람이 있을까. 정체성이 아주 모호하다.




우선, ‘걸그룹 경제학’이라는 이름을 내걸었기에 시작은 전부 걸그룹 관련 주제다. 
1. 소녀시대는 왜 멤버 충원을 안 할까 - 메뉴비용
2. 설현만 잘나가도 AOA가 웃는 이유 - 낙수효과
3. 차오루가 걸그룹을 안 했다면 - 기회비용
4. 혼성그룹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 - 외부효과
5. 아이유가 유독 드라마에서 빛을 보지 못하는 이유 - 핵심 역량 등등.


하지만 위 주제들과 연결되는 경제학 이론은 설명력이 부족하다. 이를테면 1. 소녀시대가 제시카 탈퇴 후 멤버 충원을 하지 않는 이유로 ‘메뉴비용’을 들었다. 새 멤버가 합류하면 그 멤버에게 처음부터 안무를 가르쳐야 하고, 언론에 새로 홍보해야 한다는 이유라고 한다. 그래도 메뉴비용을 감수하고 멤버를 교체해 성공한 걸스데이를 언급한다. 그러고는 메뉴비용 개념을 I SEOUL U로 브랜드명을 바꾼 서울시와 메뉴비용을 감수하고 정당명을 자주 바꾸는 한국 정치로 이어지며 한 소주제가 마무리된다.


우선, 소녀시대가 멤버 충원을 하지 않은 이유가 고작 메뉴비용 때문이라는 논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새 멤버를 오디션으로 뽑는 비용, 안무를 가르치는 비용, 홍보하는 비용 때문일까?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연예기획사인 SM이, 매년 엄청난 경쟁률을 자랑하는 오디션으로 연습생을 뽑고, 안무를 가르치며, 자사 가수 홍보에 투입할 자금이 충분한 SM이 과연 그 이유 때문에 소녀시대 새 멤버를 뽑지 않았을까?


차라리, 소녀시대의 성공을 지켜본 골수 팬들에게 ‘새 멤버’의 투입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는 설명이 더 그럴듯할지도 모른다. ‘나의 소녀시대는 탈퇴한 제시카를 포함해 9명일 뿐이다. 새 멤버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올드팬의 완고함을 설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논리가 '메뉴비용'보다는 나았을 거라 생각한다.


또 하나의 반론을 들자면, 걸스데이는 소녀시대의 SM보다 훨씬 영세한 기획사다. 그런데 걸스데이가 ‘기대해’와 'Something'으로 전성기에 오르기 전까지 두어 번의 멤버 교체가 있었다. 저자가 주장한 메뉴비용의 논리라면, SM보다 자금력이 약한 드림티엔터테인먼트는 어떻게 걸스데이 멤버 교체를 감당했을까? 새 멤버 안무도 가르치고, 홍보도 다시 하는 비용을 치러가면서? 같은 메뉴비용이라 해도 SM보다는 드림티가 훨씬 큰 타격으로 다가왔을텐데 말이다. 멤버 교체의 손익을 단순히 '메뉴비용'으로 따지는 건 현실 설명력이 부족하다.




AOA 설현의 성공과 낙수효과를 언급한 챕터는 아예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우선, ‘낙수효과’는 MB정권 시절 이미 현실고증에 실패한 이론이다. 대기업 감세와 규제완화로 기업활동이 활발해지면 그 효과가 사회 전체로 퍼진다는 낙관론은 5년에 걸친 대기업 사내보유금 증가로 힘을 잃었다.


심지어 걸그룹 사례도 현실고증이 안 된다. AOA 설현이 한 인터뷰에서 ‘수입은 멤버들과 1/n하는 걸로 안다’고 말하자, 같은 그룹 멤버 초아가 부정했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반되는 인터뷰가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이 지점에서 설현의 성공과 낙수효과를 연결하려는 시도는 논리적 비약에 불과하다.

놀라운 점은, 저자도 책에서 낙수효과가 현실 설명력이 떨어진다는 학자들의 논의를 인용한다. 그리고 AOA 설현과 초아의 엇갈린 인터뷰도 담았다. 그럼 이 챕터는 대체 왜 쓴 걸까. 현실 설명력 없는 이론과, 적용할 수 없는 걸그룹 사례에 지면을 할애한 이유를 모르겠다.




이 외에도 ‘아이유가 드라마에서 빛을 못 보는 이유는, 아이유의 핵심역량이 연기가 아니라 음악이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을 한 챕터에 걸쳐 장황하게 써놓고, 차오루의 연예계 데뷔 기회비용으로 ‘사회생활을 했을 때 연봉 얼마 수준의 직장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라는 식의 논리가 한 챕터로 다뤄진다. 

아이유의 드라마 부진을 구체적으로 쓰려면, 차라리 비슷한 나이의 수지가 영화로 성공한 것과 비교하면서 ‘아이유와 수지는 어떤 이미지 차이가 있었는지’를 SNS 데이터로 비교해보는 건 어땠을까. ‘대중들은 음악인 아이유와 드라마 주인공 아이유를 다르게 소비한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이다. 아이유의 음악을 듣고 호평하고, 드라마를 혹평하기 때문이다. 대중들이 알고 있는 것 이면의 무언가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다음소프트에서 소셜 데이터 분석은 무엇을 위해 진행한 걸까. 




데이터 리터러시도 문제다. 책에서 직접 찍은 내용인데, ‘2011년 ~ 2016년까지의 Apink 멤버별 SNS 언급량’ 그래프다. Y축의 단위는 %로 표시되어 있다. 비율의 함정에 빠질 요소가 다분한 그래프다. 저 그래프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2011년 ~ 2016년 SNS에서 Apink 멤버 언급량’이 필요하다. 




2011년 Apink 총 언급량이 1000인 반면 2016년 언급량이 100이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이 비율 그래프는 아무 의미가 없다. 2011년 정은지의 언급량은 약 160일 것이고, 2016년 정은지의 언급량은 25에 불과할 것이다. 이 경우 ‘멤버별 언급량이 고르게 분포한다’는 분석이 중요한 게 아니라, Apink의 인지도 자체가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단순 비율만 놓고 ‘멤버별 언급량이 일정한 것으로 보아 원맨팀이 아니다’식의 주장을 펴는 것은 부질없는 분석에 불과하다.


다음으로, 외부효과를 언급하며 트와이스와 여자친구의 2015년 SNS 언급량을 보여준 데이터다. 혼성그룹이 뜨지 못하는 이유로 팬덤 문화를 들며 ‘같은 소속사 내의 걸그룹과 보이그룹은 서로서로 응원해 주는 모습을 보이는 긍정적 대체효과가 발생한다. 혼성그룹은 이 파워가 약하다’는 주장을 편다. 그리고 그 근거로 트와이스와 여자친구의 SNS 언급량 차이를 보여준다. 



물론 JYP에는 Day6나 2PM, GOT7과 같은 보이그룹이 있고, 여자친구 소속사인 쏘스뮤직에는 없다. 그리고 같은 소속사의 보이그룹과 걸그룹 팬들 간에는 서로 밀어주는 문화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런 변수 통제도 없이, 두 그룹의 SNS 언급량만 단순 비교하며 ‘보이그룹의 유무가 SNS 언급량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최소한 해시태그에 #트와이스 #보이그룹이름 이 같이 쓰인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를 제시했어야 한다. 아니면 신빙성을 높일 근거로 VIXX와 구구단이 같이 소속되어 있는 젤리피쉬엔터테인먼트 데이터나 SM의 f(x), 레드벨벳의 SNS 언급량 데이터를 같이 보여주는 정도의 성의는 있어야 했다. 


단순히 아이돌 시장의 이해에 무지한 수준을 떠나서, 잘못된 통계해석으로 결론을 내는 오류가 책에 수시로 등장한다. 정치권이야말로 통계를 활용해 거짓 주장을 하기 참 쉬운 곳인데, 정치부 기자님이 이런 실수를 범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걸그룹 경제학’이란 이름을 달고 책이 나왔지만 경제학 설명이 부실하고 데이터 해석이 부실하다면, 최소한 팬심에 기반한 아이돌시장의 운영 매커니즘이라도 짚을 수 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일명 덕력. 하지만 이 책은 그것마저 저버렸다. 2000년대 후반 소녀시대에 빠졌던 라이트한 삼촌 팬, 딱 그 정도에 가깝다.


그 예로, 2NE1과 Miss A가 데뷔 직후 음악방송 1위를 하는 등 승승장구하다가 일찍 사라진 이유를 ‘필즈상 효과’라고 칭한다. 필즈상은 수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40대 이하 수학자에게 주는 상을 말하는데, 이 상을 받은 수학자들이 이후에 내는 연구논문의 성과가 필즈상 수상 이전에 비해 떨어지는 효과를 '필즈상 효과'라 부른다. 


저자는 2NE1과 Miss A가 너무 빠르게 성공을 이루었기 때문에 동기부여의 저하가 빨랐을 것이란 이유로 '필즈상 효과'를 주장했다. 저자가 직접 2NE1과 Miss A 멤버들과 인터뷰하며 속마음을 들여다본 게 아닌 이상, 이 주장을 믿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 Miss A보다 데뷔 후 1위 속도가 빠른 씨앤블루나 위너, iKon과 같은 보이그룹이 지금까지도 잘 활동하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필즈상 효과’는 걸그룹에게만 적용되는 효과인가? 온갖 변수와 시장상황에 의해 전성기가 좌우되는 걸그룹 시장, 나아가 아이돌 시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보이는 설명이다.
  
이외에도 인과성을 확증할 수 없어 설득력을 상실한 ‘1만 시간의 법칙’을 언급하거나, 일본의 AKB48 현상을 ‘갈라파고스 현상’이라고 치부하는 등 (정작 AKB48의 투표원리를 한국으로 도입해 큰 성공을 거둔 프로듀스101도 이 책에 다루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전개가 곳곳에서 펼쳐진다. 겉표지에 화려하게 언급된 ‘생활밀착형 경제학’, ‘취향의 시대’는 본문에서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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