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고 기록하는, 경제학과 출신 개발자의 노트

세줄요약 독서

오늘은 잘 모르겠어 - 심보선 시집

inspirit941 2017. 12. 7. 21:47
반응형



시는 극도로 정제된 표현과 언어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풀어낸 결과물이다. 그러다보니 시 안에서 파악할 수 있는 맥락만으로는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일반적인 소설이나 수필, 논증하는 글은 글 안에서 보통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실마리가 주어지는 데 비해, 워낙 정제된 표현이 많은 시는 맥락을 이해할 배경지식을 거의 주지 않는다. 그래서 보통은 저자의 경험이나 환경에서 유추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나에겐 쉽지 않았다. 저자가 어떤 생각으로 이 시집을 엮었는지는 인터뷰를 통해 미리 봤지만, 인터뷰 내용을 알고 나서도 시 내용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시집만큼은 세줄요약이 불가능했다. 어차피 시집의 시 내용 전체를 내 이야기처럼 느끼고 공감하는 건 어려울 거라 생각했었다. 표현이 독특하거나 착안점이 신선했던 부분, 의미를 느꼈던 몇몇 부분을 적는 것으로 독후감을 구성해야 할 것 같다.

인터뷰 URL: http://news.bookdb.co.kr/bdb/Interview.do?_method=InterviewDetail&sc.mreviewNo=80243




극장의 추억 中 (p17~18)
...
인간이여, 너희가 감히 미래를 논하다니 시간이란
영원의 늪에 빠져 서서히 맴돌며 가라앉는 수레바퀴에 불과하거늘
주변을 돌아봐라 무엇이 흐르고 무엇이 변하는가
모든 것들이 제자리에 평화로이 깃들고 간혹
익숙한 자연의 배치 사이를 고요히 거닐 뿐이다

인간이여, 몸부림치고 또 몸부림칠지어다
늙음은 시간과 주름의 비례로 측정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별안간 거울에서 나타나 너희를 경악케 할 것이다
죽음은 너희의 추악한 얼굴을 들이밀고는
가차 없이 거울을 깨뜨릴 것이다
거울 조각을 주우려 허리를 굽힐 때 너희는 쓰러져
격한 몸부림을 끝으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영상도 눈앞에 어른거리지 않는 영원한 잠에 빠질 것이다
...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대자연의 장엄한 경관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무력감’을 ‘숭고함’이라고 표현했다. 인간의 노력으로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것을, 대자연의 시간과 공간 앞에 인간이 한없이 작은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고 느끼는 무력감, 경외감이 바로 숭고함이다.
대자연 속에 있으면 이 숭고함을 느끼지만, 보통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숭고함보다는 교만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노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대자연의 힘이 강력하다는 사실은 거대한 자연재해가 휩쓸고 지나가지 않는 한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자연이 갖는 가장 큰 힘은 시간이다. 그 어떤 인간도 흘러가는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다. 누구라도 늙고, 병들고, 종래엔 죽는다. 자연이 거쳐 온 기나긴 시간에 비하면 한없이 짧은 것이 인간의 삶이다. 그 짧은 삶을 살면서 인류의 미래나 자연의 미래를 논하는 모습이 신의 입장에서는 이렇게도 보일 수 있겠구나 싶었다.


축복은 무엇일까 中(p30~35)

...
나는 아이가 없다
나는 아이가 없다
아이가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
내가 죽어도 나를 닮은 한 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것을
먼 훗날 내 죽음을 건너뛰고 나아갈 튼튼한 다리가
지금 내가 부르면 순순히 멈춰 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는 아이가 없다
아이 대신에 내겐 무엇이 있나
그렇다
내겐 시가 있다
시를 쓰며 나는 필사적으로 죽음을 건너뛰어왔다
...

아이 대신에 내겐 또 무엇이 있나
그렇다
당신이 있다
아이가 있었다면 아이에게 해줄 것들을
나는 당신에게 해주었다
...
나는 안다
시를 쓰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내 대신 죽어간다는 사실을
그들은 내 대신 죽어간다는 사실도 모른 채
죽어간다. 내가 태어나지 않은 내 아이를 대신해
살아가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나의 연인이 누군가의 행복을 대신해
슬퍼하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나의 시가 누군가의 슬픔을
대신해 사라지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축복은 무엇일까
당신이 나를 부를 때 생기는 귓속의 부드러운 압력일까
내 주위에 언제나 나를 좋아하는 바람이 분다는 것일까
당신은 나의 축복일까
내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나는 모른다
...

세상에 태어난 이상, 자신의 흔적을 어떤 형태로든 남기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인 것 같다.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자손 번식은 가장 보편적인 형태고, 예술 작품이나 지적 성과와 같은 업적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도 한다. 화자의 경우는 시를 쓰는 행위가 곧 자신의 흔적을 지상에 남기는 것이었다. 시를 쓰는 대상은 여기서는 ‘당신’이었다. 화자는 ‘아이에게 해줄 것을 당신에게 해주었다’는 말 뒤에 ‘새 이름을 지어 주거나, 머리칼에서 마른 나뭇잎을 떼어주거나, 죽지 않기 위해 당신과 사랑을 했다’라고 덧붙였다. 시를 쓰면서 화자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바라본 대상은 ‘당신’이었다. 그게 시를 읽는 독자일지, 화자가 상정한 대상인지는 분명치 않다. 화자는 다만 시를 쓰고, 고민의 흔적을 남기고자 했다.
그렇지만, 창작이라는 건 고통스럽다. 오래도록 세상에 남을 흔적을 고민한다면 더욱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남들과 다른 시도, 남들이 생각해 본 적 없던 도전이 가치가 있어야만 세상이 기억해 준다. 새로움, 다름을 추구하려는 창작은 고통스럽고 어렵다.
아이를 낳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이는 내 유전자를 후대에 이어 줄 매개이지만, 외부 환경의 위협에서부터 스스로를 지킬 때까지는 보호의 대상이다.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부모라면, 내 아이가 잘 자랄 수 있게 교육하고 보살피는 일도 필요하다. 아이가 뜻대로 따라주지 않아도 스트레스고,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도 스트레스일 수 있다.
어느 쪽이건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행위는 힘든 작업이다. 그렇다면 이 작업이 축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화자는 그래서 ‘나는 모른다’라고 마무리했을 지도 모른다.


이별 씬 中(p50~)

신은 우리를 따로따로 발견했지
2월과 8월에
다른 배 속의 암흑과 소용돌이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거슬러 천천히 하나가 되었지

사랑은 두 존재를 하나라 믿는 신의 착란이라고
사람을 떠나는 것은 사람의 첫번째 자유라고
나는 말하지 않았어

지나는 행인들은 우리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처다봤지
...

그들이 잠자리에 들 때
'나는 오늘 거리에서 말없이 마주 선 남녀를 보았어'
라고 문득 생각한다면 그건
우리가 타인의 꿈의 입구에서 재회했다는 뜻일까?


마지막 표현이 인상적이어서 집어넣었다. 나와 너는 이별했다. 그렇지만 둘이 함께 있던 마지막 순간을 누군가가 보았다면, 그래서 그 장면을 기억한다면, 너와 나는 타인의 머릿속에서라도 재회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사실 가장 중요한 당사자인 너와 나는 이미 이별했고, 아마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이렇게라도 생각하며 위안을 삼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아직 완전히 이별하지 않았다고, 누군가에게는 우리가 만나는 순간이 기억될 거라고. 이별한 다음 다시는 못 본다는 현실과 다시 보고 싶다는 소망을 ‘타인의 꿈의 입구에서 재회했다’는 표현으로 드러낸 것이 참신했다.


잃어버린 10년 中 (p171~)

:05년에서 14년까지, 10년 간 잃어버린 후각을 침대에 누워 있던 어느 날 밤 되찾은 화자
...
그에게 드는 첫번째 감정이란 필시 경이로움 아니겠는가
...
(하지만 이전까지 그에게 친근했던 모든 것들 - 어머니의 정항아리, 창고에 쌓아둔 가구, 1980년대 교양서 등등)
...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나를 과거로
그토록 아름다웠던 과거로 데려가지 못했다.
...
또한 나는 냄새나는 사랑하는 여인의 품에서
냄새나지 않았던 옛 애인들을 떠올렸다
냄새만 오로지 냄새만 맡게 해달라는
터무니없이 분명한 이유로 그들을 찾아간다 해도
이미 모든 것이 변했을 것이다
노화를 숨길 수 없는 그들의 주름진 피부에는
다른 남자들의 체취가 깊이 배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냄새
아버지의 냄새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0년의 기간 어느 해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이후 나는 아버지의 옷가지를 꺼내 입기 시작했다
...
아버지의 옷들에 코를 파묻었다
아아, 그러나 어머니는 그것들을 너무 자주 세탁기에 돌리신 것이다!
아버지의 냄새는 좀벌레가 옷 여기저기에 파놓은 
눈곱만 한 구멍들로 자신의 부재를 증거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집 안의 좀벌레를 찾아보자
녀석들의 작고 하얀 주둥이에 묻은 망자의 잔향을 맡아보자
아아, 그러나 알고 보니 좀벌레의 수명은 최대 3년에 불과한 것이다!
...
나는 안다
세계가 돌이킬 수 없이 변한 건
새로이 나타난 냄새 때문이 아니라
영원히 사라진 냄새 때문이라는 것을
내가 비록 후각을 되찾았지만
냄새는 결코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추억이란 냄새의 경이로운 속임수
시간의 구멍에서 꺼내
허공으로 날리는 흰 비둘기라는 것을
...

후각, 냄새로 세상을 이렇게도 바라볼 수 있겠구나 싶었다. 나도 만성 비염을 앓고는 있지만, 10년 가까이 냄새를 거의 맡지 못하던 사람에게 후각이 해방되었을 때의 심경이 어떠할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후각과 냄새가 사람의 정서, 그 중에서 특히 그리움을 자극할 수 있는 매개라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다만 이 매개는 철저히 개인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좋은 향은 누구에게나 긍정적인 피드백을 유발하지만, 무의식의 측면을 넘어 어떤 감정이나 경험을 떠오르게 하는 냄새는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이를테면 패스트푸드 가게에서의 감자튀김 냄새가 누군가에게는 기분 좋은 경험을 되살릴 수도 있지만, 하루 종일 감자튀김을 만드는 알바생에게는 지옥 같은 냄새일 수도 있듯이.
세계가 돌이킬 수 없이 변한 건 새로운 냄새가 아니라 사라진 냄새라는 화자의 표현도 공감할 수 있었다. 물론 잃어버린 걸 더 크게 인식하는 사람의 본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냄새는 기억을 되살리고 추억을 환기하는 강력한 도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어떤 냄새를 영원히 맡을 수 없다는 것도, 무언가를 영원히 볼 수 없다는 것만큼이나 큰 변화일 것이다. 특히 화자에게는 10년 만에 돌아온 후각으로, 아버지의 옷에서 더 이상 아버지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 자체가 슬프고 안타까운 상황이다. 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방법 중 하나가 완전히 쓸모없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을 테니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