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220328
절망할 권리가 없는 건 ‘우리'가 아니다.
수구세력을 비판하며, 촛불의 염원으로 집권해 놓고는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586세대 당신들뿐이다.
2013년 ~ 2020년까지 저자가 쓴 한겨레 칼럼을 주제별로 묶어서 낸 책.
저자의 이력 특성인지 한겨레라는 매체 특성인지는 모르겠으나
지나칠 정도로 친독일, 반미국 성향이며 민주당의 행보를 과하게 신뢰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어떤 면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무엇을 왜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지 돌아볼 수 있다.
서문에 저자가 썼듯, 이명박 - 박근혜 10년 이후 문재인 5년간 상황이 호전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
사실 이 책은 서문만 봐도 된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더 나은 미래를 줄기차게 외쳤던 586 민주화 세대가, 정작 집권한 뒤 나라를 나락으로 떨어뜨리자 보다못해 비판하기 위해 낸 책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던 2013년부터 문재인 정권 3년차인 2020년까지를 보았을 때, 이전 정권에서 비판한 사회문제가 하나도 해결된 게 없다는 현실인식이 담겨 있다.
1장은 읽어볼 만 하다고 생각한다. 정치 이념이 아니라 순수히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 그 안에서 개인이 어떤 형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를 나름 잘 설명해두었다. 독일유럽연구센터 소장이라는 저자의 이력 때문인지 독일과의 비교서술이 많고, 한병철 저 ‘피로사회' 가 오버랩되는 주장이 많다.
교육정책: 대한민국 수립 100주년인 2019년에는 의미있는 교육 철학을 제시하길 기대했으나, 이전 정권 10년의 방식이었던 입시와 경쟁 위주의 관성을 그대로 따라가는 모습에 실망함
정치사회: 대통령을 비판하는 광장 민주주의를 넘어 회사 사장의 잘못에도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는 경제 민주주의를 기대했으나, 가면 시위대의 모습에서 인격화된 저항마저 사라져가는 모습에 실망함
대북정책: '문재인 독트린'과 자주적인 평화를 주장했음. - 최근 북한의 ICBM 도발로 무의미해짐
전반적으로 칼럼을 모아뒀다는 특성상 비슷한 주장과 근거가 반복되는데, 날카롭다거나 냉정하다거나 공정한 시선이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냥 ‘한쪽의 의견이 이렇구나’ 라는 느낌. 저자의 의견에 정치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동어반복하는 책의 주장에 짜증날 수 있다.
아래는 내가 이 책에서 느꼈던 몇 가지 비판사항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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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전체적으로 수구세력(보수)과 보수세력(진보)라는 이념론적 이분법 사고관을 끝까지 벗어나지 못했다. 2020년 4.15 총선을 앞두고는 역사적 의미라며 “과거 독재시대, 식민시대, 냉전시대의 잔재를 청산하는 시간”, “새로운 100년의 역사와 비전을 제시하는 정당에 길을 열어주어야 하는 선거" 라며 분위기를 띄웠다. 정치 지형을 한 발짝이라도 왼쪽으로 움직이는 계기라며, 50년 계속된 지역주의를 해결하기 위한 선거라며 거창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 때 민주당은 미래통합당을 누르고 역사적인 대승을 거두며 ‘국회 180석'을 확보했다.
그 이후 2022년까지. 과연 정치 지형은 한 발짝이라도 왼쪽으로 움직였는가?
- 박원순 성추문 의혹, 윤미향의 위안부 갈취 논란에서 발생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있었나?
50년 묵은 지역주의는 해결되었나?
오히려 지역뿐 아니라 수많은 요소 - 성별, 주택, 직업, 정치성향 - 로 교묘히 갈라치고 분열을 조장하지 않았나?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없는 수준의 적은 표차의 대통령 당선인이 탄생했고, 지역별 득표율 - 지역주의 - 는 악화하지 않았나?
우경화된 정치 세력은 사라졌는가?
- 독재시대의 잔재라며 그토록 배격하던 미래통합당은 국민의힘이라는 후신으로, 민주당보다 왼쪽일 수는 없는 성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 오히려 대선에서 신승하며 ‘개같이 부활'했다.
탄핵으로 명분을 잃은 정당에게 고작 5년만에 정권을 내줬다는 건, 지난 5년간 집권한 세력이야말로 수구화되었다는 의미 아닐까.
선거권을 18세 이상으로 확대하자는 주장에는 일관성이 없다. 저자는 한국 교육을 날카롭게 비판할 때 ‘자주적인 민주시민'을 양성하지 못하는 한국 교육을 개혁해야 한다고 했다. 독일의 과거청산과 반성을 예로 들며 제대로 된 성교육, 정치교육, 생태교육을 통해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시민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못한 한국에는 ‘자아정체성이 약한 인간'을 길러낼 수밖에 없으며,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어렵다고 했다.
그렇다면, 교육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18세 이상으로 선거권 연령을 낮추는 건 무엇을 의미하나? 독일의 사례를 갖다대며 18세로 연령을 낮추자는 제안을 하려면, 스스로 주장한 것처럼 교육에서의 개혁이 먼저 이루어지고, 개혁의 결과로 충분히 자아정체성이 확립된 학생이 교육되어 나오는 시점에서야 논의되는 것이 순서이지 않을까? 왜 어느 컬럼에서는 교육 개혁을 외치고, 다른 컬럼에서는 연령을 낮추자는 논의를 동시에 한 걸까?
이명박, 박근혜 등 저자의 표현으로 ‘수구'세력은 대학의 비판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재정지원과 행정제도로 핍박했다는 식의 주장도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문화계 블랙리스트처럼 학계 블랙리스트가 있었을 수는 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처럼 실체가 밝혀지진 않았지만.
하지만 저자가 한국 대학의 현실을 비판했던 것처럼 ‘전국 대학의 80%가 사립대학', ‘정부 지원금 없이는 자립이 불가능한 재정자립도’는 정부 입장에서 해결해야 할 이슈다. 재정자립도가 낮은 사립대학일수록 기업의 지원이 필요하고, 기업의 입맛에 맞게끔 대학을 개편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대학은 자본이 아니라 이념의 장이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라도 대학 구조조정은 필요했고, 부실대학이 정부지원금을 받아 유지되거나 기업 지원금을 받아 취업양성소가 되는 건 피해야 했다. 이것이 대학 구조조정의 명분이었고, 재정지원과 행정제도로 부실대학을 압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재정지원과 행정제도'로 “이념을 내세우는 좋은 대학”을 핍박했다는 예시나 증거를 제시했다면 모르겠지만, 책에서는 그런 예시는 찾을 수 없었다. 단순히 ‘대학을 재정적으로 / 행정제도로 핍박했으며, 그 이유가 그들이 수구세력이기 때문’이라는 식의 논리는 지나치게 이념 편향적이라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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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코로나로 무너졌다는 주장은 그 당시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섣부른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트럼프 정부와 코로나 역병으로 드러난 미국의 민낯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미국의 헤게모니가 끝났다느니, 미국의 속국처럼 사는 건 그만해야 한다느니, 한류와 케이팝 등 우리가 미국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이 얼마든 있다느니 하는 주장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간단한 예시로, 세계 컴퓨터과학자 상위 1000명을 선정한 최근 기사다. 1위가 미국으로, 전체의 50%가 넘는다. 2위가 컴퓨터과학에 어마어마한 투자를 한 중국으로 9%이다. 미국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자본주의라는 이념 때문이 아니라, 미래 경제력과 군사력, 패권을 책임질 기술력에서 타 국가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이 격차는 미국이 자본주의를 쥐고 있으며 세계의 질서가 자본주의로 움직이는 한, 미국이 세계의 자본을 끌어들이는 위치를 유지하는 한 쉽게 무너지지 않을 질서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92/0002250998
한류와 케이팝만을 가지고 미국보다 잘하는 것이 얼마든지 있다는 주장은 그저 안일하다. 한국의 문화콘텐츠 능력이 주목받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과연 이 능력이 ‘국가적 역량'이라고 부를 만큼 체계적, 제도적으로 마련되어 있나? BTS 같은 글로벌 아이돌 그룹, 봉준호 감독이나 윤여정 배우와 같은 사례를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국가적 역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대체 무엇인가? 만약 정말 국가적 역량으로 만든 성과라면, 이번 정권이 유난히 ‘개인의 성공에 숟가락 얹는다'는 비판을 왜 듣고 있는가? 미국보다 낫다며 자화자찬하던 k-방역의 결과가 전세계 확진자 수 1위라는 사실은 어떻게 봐야 하나?
미국의 속국처럼 사는 건 그만하자는 주장은 2000년대 초반 반미감정이 높았을 때에나 통하던 문법이라고 생각한다. 20년 전과 달리 중국이 급부상한 현재, 한국을 속국 취급하고 무시하는 건 미국보다는 중국이다. 사드 배치와 한한령을 기점으로 중국이 한국에 행한 경제적 보복, 위협이 불과 몇 년 전이다.
자주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정언명령이다. 그 자체로 올바른 명제라고 볼 수 있이며, 진보 지식인이라면 다들 내뱉었을 법한 말이다. 하지만 한국 근처에 있는 5개 국가 - 일본, 중국, 북한, 러시아, 미국 - 를 봐라. 이들 사이에서 진정한 자주국방을 이룩하려면, 미국의 도움이 필요없을 만큼 국방력과 억제력을 갖추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작정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다고 자주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중립국 지위를 유지하는 스위스가 존중받아온 이유는 역사적으로 강한 군사력 때문이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