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신뢰 (현대지성 - 옮긴이 이종인)
성숙한 어른이 되려면 남의 말을 그대로 순응해서는 안 되며,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스스로의 방식대로 밀고 나가는 ‘자기 신뢰'가 필요하다.
운명을 구성하는 ‘자연의 논리'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으나, 인간의 운명을 구성하는 한 요소인 ‘자유의지'는 운명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반드시 있으니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업보 쌓지 말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말하고 행동할 것.
신플라톤주의, 초월주의와 같은 단어에 익숙하지 않다면, 이 책의 후반부에 옮긴이가 적은 ‘해설' 부터 먼저 찬찬히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무턱대고 앞부분부터 읽기 시작했다가 책을 던져버리고 싶을 만큼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자유의지>
모세, 플라톤, 밀턴 등 우리가 추앙하는 훌륭한 사람들, 천재(Genius) 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남의 말을 모방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는 바를 말하고 남겼다'는 뛰어난 공로를 남겼다. 보통의 어른은 자신의 말과 행동이 주변에 어떤 반응 (i.e. 동정, 증오, 분노)을 이끌어냈는지 참고하고, 어떤 반응을 유발할지 예상해가며 말과 행동을 한다. 하지만 천재는 타인과 사회의 반응을 토대로 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세상에 내보였다.
그들이 진실로 옳다고 믿고 세상에 내보인 메시지는 타인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닌 타인의 호응을 이끌어냈고, 학술적 진보 또는 사회 제도의 변화로 역사에 남았다. 에머슨은 아예 ‘사회 제도란 한 인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선 것'이며, ‘모든 역사는 몇몇 강건하고 진지한 인물의 전기로도 요약할 수 있다’고도 표현했다. 종교개혁의 마르틴 루터, 감리교의 존 웨슬리 처럼.
에머슨은 자신의 본성과 기질을 제외하면 그 어떤 것도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제약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예컨대 역사는 ‘인간이 만든 역사는 나의 Being과 Becoming 여정을 돕는 우화 정도의 의미가 있을 뿐, 그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주제넘은 것'이라고 표현했고, ‘어떤 것이 내 의무인지를 나보다 더 잘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주변에는 항상 있다. 여론을 따라 사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위대한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종교의 영향력이 지금보다 컸을 1800년대임에도 형식적이고 영감 없는 설교를 비판하며 ‘너 자신의 마음이 그리스도가 가르친 것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 나는 먼저 나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자신의 과거 일관성마저도 ‘일관성이란 누군가가 나의 행동궤적을 찾아볼 때,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한 것이다. 어리석은 과거의 일관성에 얽매이지 말고, 언제나 새로운 날을 맞이하며 사는 것이 지혜의 법칙이다’라며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면 에머슨이 말하는 ‘자기 신뢰'는 단순히 ‘자신의 본성과 기질을 믿는 것'인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았다. 에머슨의 표현을 빌리면 자기 신뢰란 ‘자신의 영혼을 믿고, 오버 소울을 통해 일자와 합일하는 것'이다. 오버 소울은 뭐고 일자는 또 뭔가… 싶은데, 일자는 대충 ‘신플라톤주의에서 최고로 치는 상태’를 말하고, 오버소울은 대략 ‘개인의 영혼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사물의 모든 것을 투명하게 관찰하는 것' 이라고 한다. 나도 이게 뭔 소린지 못 알아들었다.
에머슨은 ‘일자와의 합일’을 자연 상태의 장미에 비유한다. 내 창문 밑에 핀 장미는 예전의 장미나 더 좋은 미래의 장미를 언급하지 않는다. 매 순간, 그 온 생명이 약동한다. 꽃이 활짝 핀다고 해서 더 활동이 많은 것도 아니고, 잎 없는 뿌리 상태라고 해서 대충 살지 않는다. 장미의 본성(자연)은 매 순간 충족되어 있고, 모든 순간마다 자연을 충족시키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맥락으로 유추해보면 ‘현재에 충실하며, 자연의 논리에 순응하는 것' 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운명>
헌데 ‘자기 신뢰'를 피상적으로 이해해버리면 ‘남들이 하는 말, 사회적인 시선 다 필요없고 내 신념이 옳다'는 식으로 이해하게 될 수 있다. 남에게 피해를 주건말건,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만 말하고 행동하는 걸 정당화하는 논리로 흘러가진 않을까? ‘잘 모르고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는 말처럼?
앞서 에머슨의 자기 신뢰의 핵심이었던 ‘일자와의 합일'을 ‘현재에 충실하며, 자연의 논리에 순응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면, 자기 신뢰를 조자룡 헌 칼 쓰듯 남발하지 않기 위한 안전장치는 ‘자연의 논리에 순응'이라는 표현일 것 같다. 에머슨의 ‘운명’은 에머슨이 말하는 자연의 논리가 무엇인지를 고찰할 수 있는 에세이다.
자연이란 기본적으로 냉혹하다. 우리를 달래주거나 비위를 맞춰주지 않는다. 혜성과 소행성이 행성과 충돌할 때, 지구에서 수많은 자연재해가 일어날 때, 생물이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는 상황에 자비로움은 없다. 인간 또한 자연의 냉혹함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예측하거나 대응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해야만 한다.
운명(Fate) 이라는 단어는 ‘이미 정해져 있으며, 미래에 벌어지게 되어 있는 어떤 것' 이라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운명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자신에게 비극이나 피해가 왔을 때'가 대부분으로, ‘왜 막지 못했을까'라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운명은 미래(Future)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Fate와 Future 둘다 라틴어로 ‘이미 정해져 있다'는 어원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한다.
에머슨은 자연과 운명을 비슷한 관점으로 본다. ‘자연의 책이 곧 운명의 책'이라는 표현이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인간이 ‘운명'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운명>의 내용이 곧 자기 신뢰에서 말하는 ‘자연의 논리'인 것으로 이해했다.
개인적으로 자연과 운명을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과 인간에게 냉혹하게 느껴진다는 점에서는 비슷하게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단지 비슷할 뿐 그 이상의 관계가 있다고 설명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운명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 자연의 논리’ 가 맞나? 는 아직까지 회의감이 듬
운명의 뜻이 ‘이미 정해져 있음' 이라면,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에머슨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끌어와서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에머슨에 따르면, 운명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이고, 운명은 자유의지의 영향을 받는다. 즉 운명은 통제할 수 없으나, 내가 마음먹는 것은 자유의지의 발현이므로 내가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운명이 영향을 받는다는 논리다.
나는 에머슨의 주장에서 방점을 찍어야 하는 건 ‘운명이 영향을 받는다'라기보다는 ‘운명은 통제할 수 없다'라고 봤다. 예컨대 인간의 생로병사, 시간의 비가역성은 통제할 수 없는 운명의 원칙이자 대표적인 자연의 논리다. 여기에 에머슨은 ‘새옹지마(塞翁之馬)’를 통제할 수 없는 운명의 원칙에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 괴테의 ‘우리가 젊은 시절에 바랬던 것은 노년이 되면 떼로 몰려온다'는 교훈을 언급했기 때문인데, 괴테의 교훈은 결국 ‘좋은 행동과 나쁜 행동의 균형을 잡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아주 좋은 일이 있다면 그만큼 나쁜 일도 반드시 찾아온다, 지금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라는 생각의 힘, 의지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 마음가짐이 바로 ‘통제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자연의 논리'에 순응하면서도, 운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자유의지의 발현인 셈이다.
그렇기에 에머슨은 ‘운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고 주문한다. ‘굳센 의지를 가지고, 일하고 얻으라. 자신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것을 인정하고, 굳센 의지를 가지고 자연의 힘, 운명에 힘에 대응하라는 의미에 가깝게 들렸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반드시 있으니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업보 쌓지 말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말하고 행하는 것. 이게 내가 이해한 에머슨의 ‘자기 신뢰' 한 줄 요약이다.
‘자기 신뢰’까지는 어느 정도 납득이 됐는데,
자연과 운명이라는 두 용어를 동치해서 설명하는 순간부터 논리가 제대로 이해 안 되기 시작했다.
내가 궁금했던 점은 ‘자기 신뢰라는 명분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논박할 수 있는가?’ 였는데
- ‘자기 신뢰'는 ‘너의 마음은 그리스도가 너에게 가르친 것과 같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읊는 외부의 소리를 들을 게 아니라 너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게 맞다' 에서 출발한다. 즉 너의 마음은 그리스도가 가르친 것과 동일하다는 뜻이니 어느 정도 성선설의 범주로 이해할 수 있었다.
- 그런데 ‘자연의 논리’니 ‘운명’ 이니 하면서 자연과 운명의 관계를 모호한 단어로 동치하더니 ‘인생사 새옹지마니까 지금 잘못한 게 나중에 업보로 돌아올 수도 있다. 그러니 마음가짐을 잘해야 한다'는 식으로 논리가 전개된다. 이게 무슨..
그리고 가뜩이나 내용도 난해한데 영어 직역한 것 같은 번역투의 글은 사람 미치게 한다. 이 책의 해설부분은 읽어볼 만 하지만, 원문을 한글로 옮긴 번역부분은 정말 읽기 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