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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줄요약 독서

목민심서

inspirit941 2017. 11. 30.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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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 시기가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갔어야 할 과도기임을 증명하는 도서

(정조가 1800년에 급작스럽게 사망하지면서 조선이 근대화 단계에 진입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는데, 정조 사망 이후 권력다툼에 밀려 유배생활을 한 정약용의 저서에서도 일부 느꼈기 때문)

백성을 통치 대상이 아니라 사회의 한 계층으로 보았으며, ‘백성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민본주의 / 애민위민 정신과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주장을 동시에 담고 있는 책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통치자, 위정자에게 필요한 덕목 - 청렴, 근검, 높은 도덕적 수준, 공명정대함 - 등을 제시하였음.



한국 학자 중 비교적 근대에 활동했으며, 뜬구름 잡는 철학적 주장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을 해낸 사람의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당시대를 살던 사람들과는 다른 주장을 할 수 있었던, 남들이 보지 못했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포착할 수 있었던 시선을 배우고 싶었다.

  
목민심서의 저자인 정약용은 그 점에서 내 호기심에 부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정조 시절 관료로서, 학자로서 높은 위상을 누렸지만 정조 사후에 있던 정치 세력다툼에 밀려 19년의 유배 생활을 겪어야 했던 그의 삶 때문이다. 당대 지배계층이었던 사람의 경험과 오랜 유배생활로 경험할 수 있었던 일반 백성의 고초를 저서에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라는, 조선시대에서 완전히 다른 세계였던 두 계층을 모두 경험한 정약용이 저술한 저서가 바로 목민심서였다.



목민심서의 가장 혁신적인 부분은, 현대 복지국가가 가져야 할 덕목을 18세기에 주장했다는 데 있다. 정약용은 목민관의 가져야 할 6가지 태도 중 하나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를 꼽았고, 훌륭한 목민관이라면 4궁(窮), 즉 홀아비, 과부, 독거노인, 고아의 구제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기본 사상은 현대 복지국가의 사상적 덕목이기도 하다. 현대 복지국가는 이를 구체화해서 사회적 약자가 살아갈 수 있는 안전망을 구축한다. 단순히 공동체의 관점에서 돕고 살아야 한다는 향약과 달리 국가 권력의 구성원인 목민관이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큰 틀에서 현대 복지국가와 상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국가가 존립하고 정치를 행하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백성을 잘 살게 하는 데 바탕을 두어야 한다. 만약 백성이 못 살게 된다면 국가나 정치는 곧 그 의미를 상실한다’는 민본정치의 가르침을 확장했다. 그동안의 유교 민본정치는 백성을 단순히 통치의 대상으로만 보았지만, 정약용은 백성을 통치의 대상이 아닌 사회의 한 계층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사회의 한 계층이기 때문에, 정약용은 목민관이 백성을 대하는 태도 6가지 - 애민, 위민, 균민, 양민, 교민, 휼민을 제시한다. 단순히 통치를 잘 하는 것을 넘어서서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며 섬겨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가 살았던 18세기의 통치 이념은 이론에 치우쳐 현실감을 잃은 성리학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혁신적 사고가 돋보인다.


하지만, 나는 목민심서가 아쉽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시대가 사고하는 프레임을 뛰어넘는 사람은 드물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가장 아쉬운 점은 ‘백성을 대하는 목민관의 태도’ 그 이면에 깔린 사고방식이다. 앞서 언급한 백성을 대하는 목민관의 6가지 태도는 각각 

‘1. 애민 -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 

2. 위민 - 백성을 위해야 한다. 

3. 균민 - 백성을 균등하게 대해야 한다. 

4. 양민 - 백성을 올바르게 다스려야 한다. 

5. 교민 - 백성을 올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6. 휼민 - 굶주린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이다. 백성을 사회의 한 계층으로는 인지했지만, 가르치고 교화하며 애정으로 대해야 한다는 기존 지배층의 시혜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관리들이 지켜야 할 윤리는 충효와 같은 상향적 윤리가 아니라 아버지의 자식사랑 같은 하향성 윤리가 되어야 한다’는 맥락이 이를 뒷받침한다. 백성이라는 계층을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대상으로 인식하는 근대적 모습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모습이다.

  
시혜적 관점이 문제인 이유는, 목민심서에서 전하는 가르침 대부분을 무위로 돌릴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다. 목민심서에서 권하는 목민관의 덕목인 공정함, 청렴함을 갖춰야 하는 이유가 ‘사람으로서의 인정과 도리’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자식사랑처럼, 어리고 부족한 아이들이니 잘 가르치고 보살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목민심서에서 주장하는 높은 수준의 도덕과 청렴을 권유할 수 있을까?
  
게다가 목민심서에서는 ‘벼슬살이의 요체는 두려워할 외(畏) 한 글자이다.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 수령은 객이고 백성이 주인이다’라고 주장한다. 어리고 부족하기에 가르쳐야 하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 백성인데, 왜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나는 이 책에서는 그 대답을 찾지 못했다.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주장 자체는 조선 시대에서 혁신적인 주장이 맞지만, 그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못한 이유가 뭐였을까. 나는 그 이유가 백성을 보는 시혜적 관점을 완전히 떨치지 못해서라고 생각한다.




결국 목민심서의 바탕은 애민과 위민정신이지만, 목민심서만으로는 지방의 목민관이 이 가르침을 자발적으로 흡수할 정도의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정약용이 토지제도와 군역제도의 개선을 주장한 것처럼, 지방 목민관이 목민심서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 제도, 시스템을 주장했다면 어땠을까. 실제로 18세기 이후에 수령과 지방 향리세력 간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수령에게 과도한 권력이 집중됐다. 이는 수령의 과도한 수탈로 이어져 18세기와 19세기 조선의 경제력이 파탄 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목민관이 청렴하지 못하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제도, 또는 백성을 위하는 통치를 하고 있는지 판단할 만한 견제 세력을 제도화하는 방안을 주장했다면 어땠을까. 백성을 위하는지는 백성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목민관이 통치를 잘 하고 있는지 아닌지 피드백을 백성에게 받아야 한다. 그렇다는 건 통치 과정에 백성이 제한적으로나마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런 제도가 시행되었다면 조선에서 시행된 최초의 민주주의 성격을 지닌 제도가 되지 않았을까.
  
19년의 유배 생활에서 본 백성의 모습에서 정약용은 주체성,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독립성을 느끼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가 시민 계층의 경제적 지위 향상이었던 점으로 미루어볼 때, 당시 조선에는 백성이 주체성 또는 독립성을 보일 수 있을 만큼의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목민심서를 총평한다면, ‘백성의 고난을 해결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했지만, 목민관이라는 위정자가 백성을 위한 통치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은 제시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방의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요령, 본보기가 될 내용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책’으로써, 대부분의 내용이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필요한 마음가짐’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백성의 삶을 궁핍하게 하는 세금제도 - 군역, 토지제도 - 는 문제의 근원을 뜯어고칠 수 있는 전면적 해결방법을 제시했다. 하지만 목민관이 백성을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를 강제할 수 있는 제도나 시스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저 ‘이렇게 해야 한다. 이것이 옳다’는 식의 가르침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백성을 통치 대상이 아니라 사회 계층 중 하나로 인식하는 변혁을 일으켰지만, 그 변혁을 다수에게 전파하기엔 다소 힘이 약했던 책이어서 조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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