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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14 타이포잔치 2017 - 몸. 문화역서울 284




‘관찰의 인문학’이라는 책을 통해 도시의 ‘글자’가 전달하는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 이후, 타이포그래피나 캘리그라피처럼 ‘글자’ 자체가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에 관심을 갖게 됐다. 보통 문자, 글자는 사회에서 약속된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규칙적인 형태의 수단으로 인식하기 마련이다. ‘사과’라는 글자를 보고 사과를 떠올리지, ‘사과’라 써 있는 글자의 크기나 형태를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데 타이포그래피나 캘리그라피는 문자 그 자체에 어떤 느낌과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는 도구다. 같은 글자라 해도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무슨 폰트를 쓰는지, 자간과 장평을 어떻게 조절할지를 잘 선택하면 의미를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전시를 다녀왔다. 글자 그 자체로는 어떤 느낌과 의도를 담아낼 수 있는지 사례를 보고 싶었다. 타이포그래피와 ‘몸’ 이라는 주제를 과연 이 전시에서는 어떻게 연결하고자 했는지 알아보는 것도 꽤 재미있을 것 같았다.






오래 전 ‘쓰기’는 글자와 필기구를 매개로 한 신체적 행위였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글자와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는 필기구에서 기계로 바뀌었다.

현재의 ‘쓰기’는 필기구 또는 기술과 인간의 신체적 움직임이 응축된 결과물이다.

전시에서는 ‘포스터’를 통해 ‘쓰기’의 행위와 문화를 조명했다.
오늘날의 매체환경에서 어떤 조형적 특징이 있는지 잘 드러낼 수 있는 매개이고, 
한글에서 발견될 수 있는 독자적 조형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스터의 글자는 인상을 좌우하는 강력한 시각요소 중 하나다.
때문에 포스터의 글자는 당시대의 정신을 담고 있거나, 
포스터의 목적을 잘 드러내기 위한 디자이너의 시도가 즉각 반영되는 매체다.
또한 그래픽 디자인의 동향으로 ‘글자에서의 표현주의’성향이 가장 잘 드러난다.



전시 초입부였는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쓰기’ 가 이루어진 포스터들을 볼 수 있었다. 9가지 분류로 나뉘어 있었는데, 내가 이해한 분류는 크게 네 가지였다. 디테일을 나누면 9가지까지 나뉘겠지만, 세세한 차이는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더 큰 범위로 나눈 것도 있다.


1. 인간의 손이 가진 느낌을 그대로 살린 형태. 펜글씨, 손멋글씨, 드로잉
2. 기계의 특징을 살려서 글자에 느낌을 부여한 형태.
3. 한글의 조합을 연구하거나 해체하는 등, 글자 자체를 독립적으로 표현하는 경우

4. 글자의 예술성에 착안하거나, 음성언어로의 변환을 시각화한 경우


문자나 글자에서 ‘의미’를 생각하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었는데, ‘글자 그 자체’를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해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꽤나 신기하게 다가왔었다.




먼저, 인간의 손이 가진 느낌을 살려낸 글자들이다. 서양에서 들어온 ‘캘리그라피’라는 용어는 본래 중립성, 기계성, 효율성을 담은 표현이라고 한다. 개인과 시대를 초월해 의미를 전하는 중립성, 글자에서 손의 흔적을 지우는 기계성, 쉽고 빠르게 의미를 전달하는 효율성이 캘리그라피의 핵심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서양에서 원래 쓰이는 캘리그라피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뜻과는 좀 다르며, 따라서 전시에서는 ‘손멋글씨’라는 표현으로 대신했다.



최악의 하루 - 기분 나쁜 상태로 휘갈겨 써내려간 느낌이다. 글자 속에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였다.




기계성, 효율성 중심의 ‘타이핑’에 붓의 흔적, 손글씨의 흔적을 담아내고자 하는 시도를 담은 포스터다. 개인적으로도 이런 글씨의 느낌이 좀 더 친근하고 부드럽다고 느꼈다. 예술작품을 홍보하기 위한 포스터라면, 정보의 신속한 전달이 목적인 표시판이나 게시판과 다르게 접근하는 것도 좋은 생각인 듯 했다.




특히 손글씨의 가장 큰 특징은 ‘개인성’이라고 생각한다. 내 필체는 말 그대로 나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글자를 표현하고 의미를 전달하는 자신만의 방식이며, 성격이나 감정을 담을 수 있는 도구의 성격도 보여준다. 손의 운동감이 필기구를 따라 그대로 남겨지며, 글쓴이의 특징을 글자에 흔적처럼 남긴다는 점에서 꽤 매력적인 관찰 대상이다. 아래의 포스터는 ‘글자가 지닌 육체적, 시각적 감각을 상기시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펜글씨나 손글씨가 주는 친근함과 달리, 강렬함과 강인함이 드러나는 한국 고유의 타이포그래피 양식이 있다. 혁필이다. 포스터에 적힌 설명으로는, 혁필이라는 방식 자체는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가져왔으나 내용은 매우 반문화적이고 하위문화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한다. 적극적이고 강렬한 모습은 좋았지만, 가뜩이나 강렬한 느낌의 글자를 해체해 표현하니 가독성이 많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전시회니까 좀 더 집중해서 보고 의미를 생각할 시간을 들이지, 만약 이 포스터가 거리에 붙어 있었으면 나는 제대로 안 읽고 지나갔을 것 같다.




아예 ‘손’이 주는 느낌을 극단으로 가져가 ‘노동’의 형태로 승화한 포스터도 있었다. 확실히 전시된 포스터들 중 가장 화려하거나, 가장 손이 많이 갔을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 정도의 완성도를 보이는 포스터를 보고 과연 ‘노동 많이 했겠다’고 생각할까? 싶었다. 포토샵이나 일러스트 등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도구들이 많은 지금, 사람들이 이 포스터를 보고 ‘인간의 노동’을 얼마나 떠올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기계와 대비되는 인간 노동의 특징이라면 비효율성과 실수라고 작품 설명에서 언급하는데, 이 포스터들이 두 가지를 제대로 드러내고 있는 걸까?



사실, ‘글자’ 쓰는 일이 노동이라는 개념은 활자 인쇄가 이루어지며 거의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인쇄 기술이 발달한 이후부터 글자 쓰는 일은 노동보다는 지적 활동에 비중을 두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이라는 주제를 ‘글자’에 접합하려니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는 아니었다.



두 번째로는, 기계가 주는 느낌을 담아낸 글자들이다. 먼저 기계 특유의 날카로운 느낌에 디자이너 특유의 직관과 우연을 결합한 포스터를 볼 수 있었다. 인간의 손이 주는 느낌과 다른, 그래픽 프로그램 특유의 패턴이나 알고리즘을 글자에 담아냈다. 그래픽 프로그램이나 알고리즘 같은 경우는 디자이너가 어떤 의도와 생각으로 활용하느냐에 따라 만들 수 있는 결과가 다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추 생각’ 포스터의 경우, 등고선처럼 보이는 글자 모양과 초록 색깔, 등고선 각각의 두께가 조금씩 다른 것까지 합쳐서 보면 배추 포기가 연상되는 듯 했다.

펜글씨와 손글씨는 각자 타고난 필체나 필기구에 따라 디자이너의 개성이 담겨 있다면, 기계를 활용하는 디자이너는 어떤 도구를 사용해야 자신이 원하는 글자의 느낌을 담아낼 수 있을지를 더 고민하게 되지 않을까.




이번 전시에서 가장 좋았던 포스터는 ‘타자기’라는 소주제를 가진 해체와 재조립이었다. 타자기의 등장으로 문자는 손과 분리되었고, 각각의 자모음이 부품처럼 조립되어 글자를 만들어낸다. 이 특징을 ‘창작의 내일’이라는 포스터 주제와 너무나도 적절히 연결해낸 디자이너의 철학이 담긴 포스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창작’이라는 본질을 이렇게 잘 표현한 포스터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날 전시에서 개인적으로 꼽는 최고의 작품이었다.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내려면, 그 재료가 되기 위해 다양한 것들이 필요하다. 경험이던 지식이던 생각이던, 재료들이 머릿속에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것부터가 창작의 시작이다 (포스터 첫 번째 줄). 여기서 뭔가 창작의 중심이 될 법한 아이디어들이나 의문점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포스터 두 번째 줄), 그 아이디어에 자신의 과거 경험이나 생각, 지식들이 살을 붙여나간다 (포스터 셋째 줄). 시간이 지나며 점점 형태를 갖추고, 마지막에 비로소 ‘창작의 내일’ 이라는 글자 조합이 ‘창작’된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창작의 본질을 꿰뚫어봤고 글자의 조합이라는 특징을 잘 녹여내 표현한 포스터였다. 보고서 감탄했었다.




마지막으로 글자의 예술성에 초점을 맞춘 시각화였다. 인상적이었던 포스터 작품이 하나 있었는데, 글자의 음성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음성을 반영구적으로 보관하기 위한 것이 글자인데, 이 글자가 활자로 바뀌며, 다시 말해 글자를 쓴 사람 특유의 필체나 느낌이 활자로 대체되며 글자에 내재된 음성이 떨어져 나갔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쓴다’는 것은 음성언어의 성격이 없으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음성을 시각화한 글자를 표현한 작품이다.


단어들을 발음할 때 연상되는 음파의 모양을 시각화한 것 같았다.


‘글자가 활자로 바뀌며, 글자 속에 내재돼 있던 글쓴이의 음성이 떨어져나갔다’는 설명이 꽤나 설득력 있게 다가왔기에 인상적이었다. 활자로 대체된 글자는 의미에만 집중해 있을 뿐, 글쓴이가 손으로 써내려갈 때의 감정이나 생각을 담아내지는 못하니까. 그런데 정작 포스터는 ‘글쓴이 특유의 필체나 느낌’을 살려낸 것이라기보다는, 문자를 말로 내뱉을 때의 소리 파형을 글자로 시각화한 것에 가깝다. 표현 방식보다는 디자이너의 아이디어 착상 과정이 더 인상적인 포스터였다.




전시된 작품들을 이 외에도 계속 돌아보며 느끼게 된 것이 하나 있었다. 작품을 보고 이해하는 내 기준에 ‘가독성’이 자꾸 들어간다는 사실이었다. 글자를 ‘언어를 담는 도구’로서만 보는 게 아니라 글자 그대로의 예술성, 시각화에 초점을 맞춘 전시인데도, 내게는 자꾸만 이 글자들을 ‘읽을 수 있는가’가 중요했다.


왜 일반적인 전시와 다르게, 나는 이 전시를 글자로 ‘읽고’ 있을까? 이미지로 ‘보는’ 것과 글자를 ‘읽는’ 건 뇌가 아예 다르게 작동하는 건가? 의 고민을 하게 될 즈음, 전시 마지막 부근에서 내 고민을 담은 전시가 있는 걸 보고 꽤 놀랐다.



이른바 ‘생물 문자’. 작가는 ‘글자와 이미지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에서부터 출발했다. 작가는 ‘눈으로 인식하는 특정 이미지를 사람으로, 또는 다른 어떤 생물체로 인식하는 능력은 진화의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발현일 것이나, 글자와 같이 기호와 상징을 인지하는 것이 생득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닐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래서 작가는 ‘글자’의 반대항으로 ‘생물’을 설정하고, 글자의 인지와 생물의 인지 사이를 교란해 보고자 문자-생물, 생물-문자 세트를 디지털 프린팅과 3D 프린팅으로 구현했다.





이건 원래 TV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저 네발로 걸어다닌다.


나는 이 모양새를 가진 물체를 ‘글자’라고 인식할 수가 없었다. 모양이 기괴한 생명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작가가 생각한 ‘생물체 인식 능력은 진화의 산물이라 생득적이다’는 말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두 눈 달렸고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도 ‘저건 글자다’라고 판단하는 게 내게는 무리였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생명체의 질감이나 색깔을 띄고 있는데, 단순히 모양이 글자와 유사하다고 해서 글자로 인식하는 건 아니었다. ‘저 생명체는 한글 자음 ㅈ을 닮았네’ 정도의 인식이었다고 해야 할까. 


결국 나는 ‘아무리 예쁘고 기발한 발상에 착안한 디자인이라 해도 글자로서 의미를 읽을 수 없으면 글자로 보지 않는’ 것이고, ‘글자라는 기호의 인식보다는 생명체의 역동성을 먼저 인식하는’ 사람 정도가 되겠다. 처음에 ‘글자 그 자체의 전달력’에 주목하고자 이 전시를 찾았지만, 글자 안에 담긴 의미를 ‘보강하거나 강조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타이포그래피를 가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외에도 전시 내용은 많았는데, 뭔가 난해하거나 설명이 너무 미흡해 생각을 전개해가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전반적으로는 타이포그래피와 몸의 접점을 명확히 짚어 낸 전시는 없었던 듯 했다. 글자를 구성하는 직선, 곡선을 인간에 빗대거나, 인간이 시간을 보내는 공간인 침대의 이불에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글자를 써 둔다거나 등등. 몸의 본질과 타이포그래피라는 도구를 명쾌히 연결했다거나, 생각도 못 했던 몸의 특징, 타이포그래피의 특성을 연결한 작품이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아직 부족해서 작품을 보고도 깨닫지 못해서일수도 있겠지만. 


두어 시간의 관람이었지만, 위에 서술한 정도의 고민은 해볼 수 있었다. 잠깐 짬을 내어 들른 것 치고는, 생각을 깊게 가져가볼 수 있어서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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