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과 혼인하고, 한국에 10년 거주중인 미국 컬럼니스트의 짧은 투고본 모음.
이방인 시점에서 한국의 다양한 면모를 관찰하고 소감을 기록했다.
영화, 소설 등 문화콘텐츠 위주의 소재가 많고, 주도적이고 독창적인 모습을 높게 평가하는 반면 본질을 잃거나 모방에 그치는 모습을 안타까워한다.
김치의 나라, 삼성의 나라, 자살의 나라, BTS의 나라… 한 나라를 한두 마디의 말로 줄여서 부르면, 그 나라의 단편적인 일부분만을 전부인 양 이해하게 된다. 이 책은 ‘한류' 라는 단어도 없던 1990년대에 한식과 K팝으로 한국을 처음 접하고, 컬럼니스트로 한국에서 10년째 살아가며 한국과 미국에 투고했던 글을 모았다. 특정한 면만 보고 한국이라는 나라를 전부 이해했다는 듯 요약하지 말라는 뜻에서 책 제목도 ‘한국요약금지'라고 한다.
전반적으로 책에서 느껴지는 논조는 ‘한국은 선진국이다' 라는 존중이었다. 저자는 한국 특유의 독창성과 접근법을 견지한 경우 높이 평가한다. 영화감독인 봉준호와 홍상수, 건축가 김수근,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 이 대표적이다.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하고, 더 잘 표현하기 위해 오랜 시간 갈고 닦았으며, 성공적으로 표현해냈다는 점 때문이다.
특기할 만한 건, 평가의 관점이 ‘선진국 대 선진국'이라는 수평적인 시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저자는 한국을 다른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나름의 역사와 특징이 있는 선진국’으로 인지하고 있다. 오히려 한국의 공공기관에 인습처럼 남아 있는 ‘서구권 따라하기, 또는 서구권을 정답처럼 여기고 지향하려는 성향'을 매우 부정적으로 본다. 단순히 선진국이 중진국의 문화를 존중하고 아끼는 관점이 아니다. 한국의 체급이 더 이상 서구권을 정답이라고 추종할 필요가 없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한 ‘한국의 도로는 매력적이지만 한국 자동차는 매력적이지 않다’ 고 이야기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1990년대 한류라는 단어도 없던 시절, 미국에서 찾아간 한식당 ‘호순이'나 냅스터에서 다운받았던 베이비복스 음악에서는 독자적이고 고유한 인상이 있었으나, 지금의 한국 자동차는 미국, 유럽, 일본차의 특징을 섞어서 이름만 한국 차라고 부르는 느낌이라고. 물론 이 부분을 ‘한식이나 음악의 경우 독자성을 구축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 있었지만, 한국 자동차라는 정체성은 유럽, 일본보다도 늦게 확립되었기 때문'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한국 사회에 대해서는 뚜렷한 주관이 보이지 않았다. 다면적이고 복잡한 한국 사회에 자신의 주관을 피력하기에는 칼럼 분량이 짧아서일 수도 있고, 무엇이 옳다 그르다를 쉽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인 것도 있을 것이다. 최근 있었던 사회현상에 관련된 저자의 의견 몇 가지를 갈무리하면 아래와 같다.
국가 단위의 자살인 ‘저출생' 문제와 비혼이라는 단어의 등장은, 결혼뿐만 아니라 결혼에 수반되는 어떤 활동도 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사를 반영한다. 과한 교육비나 여성의 경력단절이 일반적인 원인으로 꼽히지만, 지향할 만한 결혼 모델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요인이었다. 법적인 의미를 빼면 오래 전에 해체된 결혼 사례가 많고, 불행한 기혼 여성은 많은데 대안 사례도 딱히 없다.
다만 서구 사람인 본인의 눈에는, 비혼을 외치는 사람들의 신념이 마치 청소년기에 드러나는 신경질적인 믿음 같다고 한다. 모든 신념이나 기대에 반사적으로 반대를 외치는 느낌. 정부의 세뇌 / 미디어의 조작 / 여성을 기계부품으로 갈아넣는 듯한 가부장제, 자본주의에 내재된 생산과 소비의 노예화 등등…
이렇게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거부한다고 외치지만, 그냥 한국 나가서 외국 여행하고, 똑같은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찍는 정도의 움직임으로 귀결되는 모습이라는 점도 지적한다. 다른 수단을 통한 순응이라는 방식의 저항은 전 세계에서 오래도록 인정받아온 성장단계 중 하나였으니, 한국이 어떤 답을 찾을지 궁금하다는 소감으로 마무리한다.
한국형 TED 포맷 프로그램인 ‘세바시'의 최다조회수 영상이었던 2012년 ‘나는 당신을 봅니다' 영상에서는 가정에서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를 말하는 화자와 공감하는 청중의 모습에서 ‘소통이 단절되고, 폭력적이었던 가족 구성원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가정이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영상에서 소통, 일상, 사회적 치유를 위한 단어로 ‘힐링'이 등장했고, 한국에서 유행어의 지위를 넘어 하나의 표현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민주화와 86세대에 관련된 단상도 일부 담겨 있다.
저자는 86세대가 민주화 혁명을 이룬 주역으로 평가받지만, 86세대의 요구에 담긴 순환논리를 담은 P.J. O’Rourke의 표현을 소개한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 좋은 것이다. -> 물론 그렇다. 하지만 정확히 왜 그런가? -> 그게 더 민주주의적이니까'
또한 ‘한국에서는 대중의 감정이 임계점을 넘으면, 의사결정 구조나 기존 법을 찢어버릴 만큼 강력한 야수로 돌변한다'는 마이클 브린의 표현을 인용한다. 이 야수는 ‘국민정서'라고 부르는 한국의 집단적 영혼이며, 최고의 것으로 간주된다. 한국인들은 ‘국민정서가 법 위에 있다’라고도 말하기도 한다고.
몇 달 전에, 마크 맨슨의 ‘나는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를 여행했다'는 유튜브 영상이 한국 언론에서 화제가 된 적 있었다. “우울한 한국, 유교 * 자본주의의 최악이 결합했다" 라는 언론 헤드라인으로도 유명했다.
이 정도로 강한 단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이 책에서도 가족관계의 균열을 치유하지 못하는 유교 가부장제의 어두운 면과, 분단국가라는 특수성에 경제 급성장으로 억눌려 있던 사회문제가 터져나오는 한국의 현상을 군데군데 엿볼 수 있다. 동등하게 평가할 만한 체급에 오른 선진국 위상에 극명하게 대비되는 명암을 엿볼 수 있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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