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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줄요약 독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inspirit941 2023. 1. 1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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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약한 나의 지성 수준으로는 이 책의 내용을 세줄요약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대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맥락을 알아야 한다.
거칠게 요약하면 맥락이 없어져서 의미 전달이 되지 않고, 앞뒤 맥락을 담으면 더 이상 요약이라고 볼 수 없게 된다. 

 

230118

 

어렸을 때 이어령 교수의 ‘생각에 날개를 달자' 라는 청소년 전집을 매일같이 읽었었다. 그땐 그저 책이 재미있어서 몇 번이고 계속 읽었을 뿐 저자에 큰 관심은 없었는데, 머리가 커진 뒤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나니 ‘이분은 정말 위대한 지식인이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됐었다. 내가 기억하는 2000년대 초반 청소년전집 속 화자인 ‘이어령 교수님' 말고, 성인을 대하는 ‘지식인 이어령'의 모습이 궁금해서 책을 몇 권 샀다. ‘이어령, 80년의 생각',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그리고 이 책에서 언급된 ‘축소지향의 일본인'. 배송된 책 중 교수님 사후에 출판되었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 제일 궁금해서 가장 먼저 손에 들었다.


 

청소년 전집 때 내가 이어령 교수님의 책을 좋아한 이유는 특유의 ‘비유와 은유' 작법이었다. 어떤 현상이나 원리를 논리적이고 단계적으로 설명할 때도 있었지만,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쉬운 상황에 빗대어 이해를 돕는 표현력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였다. 다만 비유는 때때로 독자에게도 ‘비유를 이해할 수 있고, 비유를 곱씹어보며 스스로 생각하는' 사고력과 이해력을 요하는데, 복잡한 걸 싫어하고 길게 생각하길 어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읽히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말을 청소년 전집에서도 읽었는데, 이어령 교수님은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도 ‘왜'라는 질문을 놓지 말라는 내용을 책에 담았다. ‘머리는 자기 것이지만 생각은 남의 것이어서 문제’이고, 사람이 특별한 이유는 그 사람의 생각이 고유하기 때문이며, 그 개별성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면서. 생각하는 인간으로 남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수많은 소음을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습관을 깨야 한다고.

 

 

‘마지막 수업'이라는 제목에 맞게, 책을 쓴 기자님은 마지막 생애의 불꽃을 태우는 교수님과의 대담을 수정이나 첨언을 최소화한 채 옮겼다. 기자님 스스로도 ‘책으로 옮기면서 이루어지는 자신의 퇴고가 교수님의 본의를 왜곡하거나 수정할까봐 조심스럽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책의 어떤 내용이 있었다' 라고 글을 적는 나조차도 기자님 심경이 이해가 갈 정도.



내가 두고두고 곱씹어볼 토막글 일부를 아래 적었다. 나중에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볼 때, 이 부분을 기억하고 흥미가 되살아나면 이 책을 다시 집어서 앞뒤 맥락까지 다시 읽어볼 것이다.

 





죽음과 삶에 관한 토막글

 

서양에서는 ‘영(令)', ‘육(肉)' 두 가지 개념으로 삶과 죽음을 설명한다. 하지만 나는 육체, 마음, 영혼이라는 삼원론으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설명하려고 한다.

내 앞에 하나의 유리컵이 있다. 이걸 사람의 몸이라고 가정하자. 컵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있다. 

  • 그렇다면 무언가를 담지 않은 상태가 있을 것이다. 이걸 공허(void)라고 부르자. 컵 안이 비어 있다는 건, 컵 안은 세상과 끝없이 닿아 있다. 컵이 육체라면,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육체에 닿아 있는 것이 영혼이다.
  • 빈 컵에 물을 따르면? 비어 있던 공간이 물로 채워진다. 이렇게 채워진 것이 마음이다. 무엇을 채우느냐에 따라 같은 육체라 해도 내용물은 같지 않다.
  • 컵이 깨지면 물은 흩어진다. 비슷한 맥락으로, 마음을 지탱하는 것은 육체다.
    컵이 깨지면 내용물은 흩어지지만, 빈 컵 내부에서 세상과 맞닿아 있던 공허(void)는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육체가 마음으로 채워지기 전부터 있던 영혼은, 우주의 빅뱅과 통했던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육체에서 마음을 비워야 영혼이 들어갈 공간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영혼 없는 육체란, 출근길 만원버스처럼 마음만 꽉 들어찬 상태인 셈이다. 

 

물론 살아 있는 인간의 육체에 마음만이 들어찼는지, 영혼이 가득한지는 알 수 없다. 컵은 내용물을 쏟아낼 수 있지만, 육체는 내용물을 쏟아낼 수 없으니까. 컵이 깨지고 나서야 알게 되지 않을까? 다만 마음으로만 가득 차 있던 육체는 깨지고 나면 남는 게 없지만, 비어 있는 영혼의 존재는 영원히 이어질 거다. 영혼, 공허(void)는 우주와도 통하니까.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것’ 토막글

 

언어가 틀에 갇히면, 사고도 틀에 갇힐 수밖에 없다. 내 머리로 생각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어떤 주제건 어떤 자리건 겁날 것이 없었다.

 

언젠가 바이오학술대회가 열려서 복제 양 돌리를 만들었던 이언 월머트 박사가 왔었는데, 메인 스피치를 과학자도 아닌 날더러 하라더군. 자율자동차나 AI관련 국제 행사를 해도, 글로벌 지식인 앞에서는 날더러 기조강연을 하라고들 해. 무슨 말을 해도 내가 하면 인문학적 접근이 되기 때문이지. 과학자 앞에서도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는 스스로 생각하는 인문학자와 예술가들이야.

 

‘다들 자기 머리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머리는 자기 것이지만 생각이 남의 것이니 문제지. 중국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선왕께서 말하기를' 이야. 먼저 말한 모델이 있어야 인정을 해줘. 일종의 모델 애착이지. 그러니 두 글자 숙어, 사자성어를 못 벗어나는 거야. 윗세대 말을 달달 외우다가 끝나니까.

 

아니면 이런 거지. 최초로 증기기관을 만든 사람은 제임스 와트라고들 해. 그렇다면 제임스 와트 이전에는 증기기관이 없었다는 거겠지. 그럼 제임스 와트는 발명가였나? 아니야. 제임스 와트의 직업은 증기기관 고치는 기사였어. 왜 증기기관을 발명한 사람의 직업이 증기기관 고치는 기사일까? 정확히는, 증기기관을 만든 사람은 토머스 뉴커먼이라는 사람이고, 그걸 개량해서 효율을 높인 사람이 제임스 와트야.

 

조금만 자기 머리로 생각해보면 의문을 던질 수 있는데, ‘증기기관의 발명가는 제임스 와트’ 라는 남의 생각을 별다른 의문 없이 받아들인 것 아닌가. 열 명이 있으면 열 명, 백 명이 있으면 백 명이 생각이 각각 달라야 하는 거야. 그게 정상이라네. 

무엇이든 만장일치라면, 그건 한 명과 다를 바 없네. 국회의원이 백 명이건 이백 명이건, 만장일치로 결정한다면 한 사람이야. 투표 결과에 만장일치가 많다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야. 뭐하러 투표를 하나? 왕이 다스리고 신이 통치하면 되지.

 

민주주의에서의 평등은 생각하고 말하는 자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거라네. 그 사람만의 생각, 그 사람만의 말은 그 사람의 얼굴이고 지문이야. 용기를 내서 의문을 제기해야 하네. 간곡히 당부하네만, 그대에게 오는 모든 지식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지 말게나.







‘진실의 반대는 망각’ 토막글

 

자네는 나에게 ‘진리'를 원하고 ‘정수'를 원하지. 그러나 역사는 많이 알려진 것만 기억한다네. 진실은 묻히고 덮이기 쉬워. 덮어놓고 살지 말라고 내가 여러 번 이야기하지 않았나. 왜냐면 우리 모두 덮어놓고 살거든. 그걸 들추는 게 철학이고 진리고 예술이야. 지금 우리 시대가 가장 감쪽같이 덮어놓고 있는 게 무엇일 것 같나?

 

그건 죽음이라네. 모두가 죽네. 나도 자네도.

 

과거엔 부고가 우편 전보로 날아왔어. 5일간 장례를 치렀으니까. 돌아보면 인간이 죽음과 함께 살았던 때가 생명의 시대였네. 길거리에서 거적에 덮인 시체를 보고, 방에서 할아버지가 죽고 장례치르는 것을 어린 손자가 보았지. 역설적으로, 죽음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 있었던 거야. 죽음의 흔적을 없애면, 생명의 감각도 희미해져.

 

지금은 죽은 자를 깨끗하게 얼굴 씻기고, 산 사람처럼 화장시키고, 미라 인형처럼 만들더군. 깨끗이 포장해서 태우고, 추도 미사 드리고, 서둘러 도망쳤어. 현대는 죽음이 죽어버린 시대라네. 그래서 코로나는 어떤 면에서 대단한 일을 했다는 거야. 비로소 지구의 인간들이 생명이 뭐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했네. 언제 우리가 마스크 한 장 사려고 길게 줄서본 적 있었나? 

 

그 마스크 한 장이 생명이었네. 전 인류가 죽음을 잊고 돈, 놀이, 관능적인 감각에 빠져 있다가 퍼뜩 정신이 든 거야. 자기 호주머니 속 유리그릇 같던 죽음을 발견한 거지. 주머니에 유리그릇 넣고 다녀봐. 깨질 것 같아서 불안하지? 코로나는 그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을 안고 있는 우리네 존재를 들춰냈어.

 

우리가 잊고 있던 것 속에 진실이 있다네. 경계할 것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야. 덮어버리고 잊어버리는 것.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 은폐가 곧 거짓이야.

 


 

‘지혜의 시작은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토막글



“운을 읽는 변호사" 라는 책으로 시작해서 ‘행운'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하던 中

-> 이 책의 결론은 ‘운이란 하늘의 귀여움을 받는 것. 크나큰 불운만 아니어도 복 받은 인생이다’

 

궁극적으로는 운명론과 맞닿아 있는 주장이라네. 인간의 행운과 불운은 예정되어 있다는 그 주장 말일세.

그리스 사람들은 운명론자였다네. 동시에, 합리주의의 극치를 추구했던 사람들이기도 하지. 지금 인간이 발전시킨 수학, 철학, 천문학, 미학 다 그리스 시대에 해놓은 걸 기반으로 하고 있지. 그런데 지혜의 끝까지 가본 그 사람들이 운명을 믿었다는 거야. 그 증거가 신탁이네. 신이 맡겨놓은 운명. 소크라테스, 플라톤 같은 현자들은 신탁을 믿었고, 그걸 믿고 나아갔기에 지혜자가 되었지.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의 출발이지. 지능과 덕으로 최선을 다해도, 우리는 다가올 운명을 바꿀 수 없네. 데카르트처럼 모든 것을 회의하면서 끝까지 가도,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을 만나게 돼. 빅데이터도 설명할 수 없는, 합리주의의 끝에는 비합리주의가 있지.

 

그리스에서 말하는 운명론이란, 있는 힘껏 노력하고 지혜를 끌어모아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는 거야. 오이디푸스를 보게.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를 풀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아버지를 살해할 운명'이라는 신탁에서 벗어나지 못했네.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도, 아무리 노력해도 닿지 않는 저편의 세계. Something Great가 있다는 거야. 지혜자만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네. 그걸 인정하고 겸허해지는 게 머나먼 수행의 길이야.

 

하지만 인간은 좋던 싫던, 자신의 운명에 개입하게 되어 있네. 결정된 운이 7이라면 내 몫의 3이 있네. 그게 인간의 자유의지야. 그래서 자유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에 팔자론, 숙명론을 들이밀면서 운 타령하는 걸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네. 인간이 노력할 수 있는 세계에서 운을 끌어들이면 안 돼. 1점 차이로 시험의 당락이 갈리지만, 그것도 결국 근접한 수준의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쟁이야.

 




‘나는 타인의 아픔을 모른다' 토막글

 

딜레마에 관련된 이야기 中

 

코로나 시기에 특히 그런 문제가 많이 발생해. 한 명을 살릴 것인가, 아홉 명을 살릴 것인가. 마스크는 특히 여러 함의를 갖고 있다네. 처음에는 내가 살기 위해서 썼지? 지금은 어떤가, 내가 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남에게 안 옮기려고 써. 사회적 시선의 강제가 있는 거지. 마스크 안 쓰면 벌금을 물린다고 하니까. 그러면 마스크는 쓴 게 아니라 입마개처럼 ‘씌어진'게 되는 거야. 마스크를 한 건 똑같지만, 파고 들어가면 나와 사회의 관계가 나와. 식민지 생활 오래 한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국가가 명령하니까 하는 거야. 복종이고 강제지.

 

자율성이 아니라 생명 주권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라네. 개인의 생명에 국가나 제도가 개입하기 시작하면, 전체를 위한 합리적인 결정 같아도 위험해. 미친 사람 가두는 건 당연해 보일지 몰라도, 미쳤다는 걸 누가 결정하느냔 말이지. 내 말은… 환자든 죄인이든 격리하고 처벌을 내릴 때, 무조건 ‘전체를 위한 결정' 이라는 일반론에서 시작하면 안 된다는 거야. 항상 개인의 관점을, 제도의 맹점을 함께 봐야 해. 그런 것들을 보완하기 위해 재판도 법도, 그물을 촘촘히 하고 정밀해지는 거지만.

 

 

‘백만 명이 죽었다’는 통계야. 백만 명이 죽어도, 그건 다 한명의 사적 죽음이거든. 그걸 잊으면 안 돼. 국가에서, 사회에서 볼 때에나 백만 명인 거야. 철학자들이 말하는 ‘타자성의 철학'이 거기서 나오는 거라네. ‘타자를 나의 것으로 만들지 말고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라.’

 

타자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게 사랑이고, 그 자리가 윤리의 출발점이라네. 타자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왜곡해선 안 돼. 일례로, 우리는 내가 아플 때 남이 그걸 아는 줄 알아. 하지만 그 아픔은, 자기 아픔을 거기에 투영한 것뿐이라네. ‘지금 저 사람이 피를 흘려서 얼마나 아플까?’ 그건 자기가 아픈 거야. 자기 마음이 아픈 거지. 

 

우리는 영원히 타인을 모르는 거야. 안다고 착각할 뿐. 내가 어머니를 아무리 사랑해도, 어머니는 내가 될 수 없고 나는 어머니가 될 수 없지. 목숨보다 더 사랑해도, 어머니와 나의 고통은 별개라네. 존재와 존재 사이에 쳐진 엷은 막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위선을 떨지. ‘내가 너일 수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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