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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12

건축가의 의도와 건축물 주변 환경, 건축물에 들어오는 사람의 조화는 수많은 경험과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건축물에서 읽어낼 수 있는 키워드 8개 - 인간, 경험, 역사, 정체성, 자연, 재생, 도시, 산업과 관련된 건물들을 소개한다.

건축물을 보며 건물이 만들어내는 '공간'에 담긴 의미, 건축가가 건물에 담고 싶은 '철학'이 무엇인지를 한 번쯤 생각하고 경험하게 한다.


(해외 여행갈 때, 가 볼 만한 명소들을 소개받는 기분으로 봐도 좋다.

한국에도 의미있는, 가서 경험할 만한 건물들이 많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것들을 관찰하고 질문을 던지는 습관을 들이게 되자, 이전에는 생각해 본 적 없던 것들이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일이 많아졌다. 그 중 하나가 건축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건축물이 어떻게 생겼고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관심이 없었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건축물은 눈을 어디에 둬도 꼭 보일 수밖에 없을 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워낙 건축물을 바라보는 무심한 시선이 고착화되어 있어서, 어떤 건물이나 건축물을 봐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건축의 오래된 역사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건축기술과 건축물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 중 하나다. 매일같이 우리는 집이라는 건축물 안에서 잠을 자고, 각자의 직장 또는 학교라는 이름의 건축물로 향하며,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도 수많은 건축물을 스치듯 지나친다. 그러나 이렇게 무심히 넘기는 건축물도 관심을 갖고 한 번 더 들여다보면, 건축물이 전하는 메시지를 읽어볼 수 있다. 단순히 ‘특정 용도를 위한 건축물’을 넘어 ‘메시지를 전하는 건축’, ‘예술적 가치가 높은 건축’에 이르기까지, 건축이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는 다양하고 다채롭다.

 

이 책에서는 ‘건축은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이자,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며, 사고의 대상이자 사유의 근거이다. 우리 삶의 현장이다’는 철학에서 출발한다. 건축가의 의도와 건축물 주변 환경, 건축물에 들어오는 사람의 조화는 수많은 경험과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 책은 그 바탕에 깔린 인문학적 물음과 고민을 8가지 키워드 - 인간, 경험, 역사, 정체성, 자연, 재생, 도시, 산업 - 로 차분하게 설명해준다.

 

건축가도 일종의 예술가이며, 건축가의 철학과 메시지를 주변 경관과 건축 재료, 건축 방식에 녹여낸 것이 바로 건축이다. 미켈란젤로가 조각하기 전의 돌덩이 속에서 천사를 보았고, 그 천사를 드러내는 것이 자기 일이었다고 했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건축가들도 마치 건축물이 세워지기 전에 이미 어떤 건축물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져야 하는지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 아닐까. 특히 ‘재생’ 키워드에서 볼 수 있었던, 오래된 건물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건축가의 힘은 사례들을 읽으면서도 경이로웠다.

 

‘재생’ - 살리는 건축

 

오래되어 용도 폐기된 건축물의 실낱같은 생명을 끊는 게 아니라, 새로운 개념으로 재해석해서 다시금 생명을 불어넣는 건축 철학과 사례들을 볼 수 있었다. 뉴욕의 철도 화물노선을 철도공원으로 재탄생시킨 ‘하이라인’이나, 런던 동부와 서부의 경제력 격차를 해결한 재생건축물 ‘테이트 모던 갤러리’, 군수 산업기지를 중국 예술의 메카로 변화시킨 ‘베이징 다산쯔 798예술구’ 등등. 과거의 잔해를 없애고 새로 무언가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대고 손보는 것으로 완전히 다른 가치를 제공할 수 있다는 발상이 정말 매력적이었다.


저자도 ‘무엇을 세울 것인가에 집착하기보다는, 멋있게 재생하여 새로운 콘텐츠를 입히는 것이 재생의 진정한 가치’, ‘평범함을 가공해 탁월함으로 승화시킬 때 가치를 배가시킬 수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더 이상 쓸 일이 없는 건축물들 - 오래된 철로이거나 가동하지 않는 공장 -을 어떻게 공원, 예술관으로 활용할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사고의 전환 측면에서 진정한 예술가들이다.


‘재생’이 특히 흥미로운 이유는 한국에서도 성공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주변 환경과 소통하고 생태로 회귀한다는 재생의 개념을 성공적으로 구현한 선유도공원이 그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생태공원으로 만들어낸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공원이라고 하던데, 직접 가서 보고 느껴볼 생각이다.


그 외에도 최근 건축물을 재생한 사례가 ‘서울로 7017’이다. 서울역고가를 철거하는 대신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는 길로 탈바꿈한 사례다. 이 책을 다 읽은 뒤에 한번 가 보았었는데, ‘재생’의 개념을 나름대로 잘 살려냈다고 생각한다. 원체 고가가 폭이 넓지 않다 보니 서울역에서 회현역까지 잇는 거대한 육교의 느낌은 있다. 그렇지만 다양한 종류의 식물을 배치해 어린이들이 식물을 접할 기회를 만들고, 주변 건물 2층의 카페와 연결해 휴식 공간을 확보하는 등 가족 단위로 ‘걸어볼 수 있는’ 길이 서울역 근처에 생겼다는 것은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자연’ - 가장 한국적인 현대건축은 무엇일까?

 

이 키워드가 좋았던 이유는, ‘가장 한국적인 현대건축이 뭘까’라는 질문 때문이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수준의 지식으로는, 한국적인 거면 으레 한옥이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기왓장 있고, 마루가 있는 한옥집. 그런데 이 건축은 ‘현대’건축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럼 한국적인 현대건축은 특징이 뭘까?


저자는 ‘공간사옥’ 과 ‘제주 포도호텔’을 꼽았다. 이 두 건축물이 차용한 한국적인 건축 모티브는 바로 ‘마을’과 ‘골목길’이었다. 얼굴을 가릴 수 없는 정도의 낮은 흙담과 좁은 골목길, 그리고 골목길이 만나는 지점인 너른 공터. ‘공간사옥’은 가운데 탁 트인 중정을 두고, 골목길을 통해 이어지는 집의 모습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건물이다. ‘포도호텔’의 경우 건물 외관부터 초가집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고, 골목길을 연상케 하는 내부 복도가 있다. 가운데 둥근 정원이 마을의 광장과 유사하고, 객실과 객실이 마주보는 구조로 되어 있다. 개방되어 있고 주변을 경계할 필요 없던 옛 마을의 특성을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나는 ‘한국적인 것’을 눈에 보일 만한 특징 - 기왓집, 대청마루, 마당 등 -으로 인식한 반면, 건축가는 ‘한국 건축을 담은 공간의 특징 & 그 공간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한국적인 것’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건축을 단순히 눈에 보이는 재료들의 총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건축물이 제공하는 공간과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건축을 관찰하는 첫 단계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건축이 주는 ‘경험’ - 건축물에는 생명을 부여하고, 경험은 사람의 뇌리에 박히다.

 

경외감을 줄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을 보는 경험이나, 특정 대상이나 사건을 체험하고 감각을 느끼도록 하는 것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한다. 전자의 경우 특히 ‘빛’을 활용한 건축에서 느낄 수 있고, 후자의 경우는 지나간 역사를 되새길 목적으로 세워진 건물들이 해당된다.


‘빛’은 영원한 건축의 도구다. 빛을 잘 활용해 유명한 건물 중 하나가 미국 MIT대학의 크레스지채플이다. 빛의 반사와 물빛의 반사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실내구조가 장관을 만들어낸다. 빛 하나로 더 엄숙해지고, 종교적 의미를 효과적으로 강조한 건물이다. 책에 참고로 주어진 사진으로는 제대로 감흥이 오지 않아서 인터넷으로 찾아봤는데, 그냥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경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빛이 빚어내는 공간의 아름다움은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인 듯 하다. 기술이 발달한다 해도, 공간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아우라를 재현해낼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방문객의 체험을 통해 경험을 남기는 건물로는 한국의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이 인상깊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을,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건물이다. 이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거친 바닥과 쇄석을 밟는 소리가 방문객의 귓전을 때린다. 섬뜩하면서도 무자비한 소리부터 방문객에게 공간의 의미를 환기해준다고 한다. 2층에 있는 ‘추모의 벽’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얼굴과 사망일자가 찍혀 있다. 완성된 벽이 아니라 틈새가 이곳저곳 있는데, 한 분 한분 돌아가실 때마다 벽의 틈새가 그분들의 얼굴과 사망일자가 적힌 벽돌로 메워진다고 한다. 박물관 외관의 주요 특징이기도 하고, 건물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요소 중 하나라고. 작은 주택의 구조이지만,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건물이라고 한다. 경험을 위한 공간인 만큼, 조만간 시간 내서 꼭 가 보아야 할 곳이다. 글로써 보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공간의 힘, 경험의 힘은 건물에서 직접 느껴봐야 한다.

 

건축이 전하는 이야기, 건축이 담은 메시지를 어떻게 하면 읽을 수 있는지 생각할 점을 알려주는 책이다. 철학적 사유가 취향이 아닌 사람들이라 해도, 해외여행을 갈 때 가 볼 만 한 건물들을 소개받는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소화할 수도 있다. 건축에 문외한인 내게 건축물을 보는 즐거움, 건축이 주는 이야기를 듣고 철학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길잡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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