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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장의사

inspirit941 2021. 2. 26.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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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슬픔, 무력감”이라는 단어 자체를 풀어낸 듯한 책.

지금의 20대가 삶에서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다면,
‘90년대생이 온다'나 ‘관종의 시대'보다 훨씬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냉혹한 현실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그저 버텨내고 살아내야만 하는 불안한 20대들의 이야기

 

책을 읽는 게 고통스러웠던 적은 처음이다.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을 담담히 인정하는 워딩이 고통스러웠다. 나 역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데, 글 곳곳에 묻어 있는 저자의 상처와 아픔이 느껴질수록 내 마음 속 통증도 되살아났다. 기댈 곳 없고 위로받을 곳 없이 어떻게든 버텨온 삶, 한때 부풀었던 꿈은 허상이고, 내가 사는 현실에 수긍해야만 하는 게 싫지만 달리 방도가 없다는 데서 오는 무력감을 마주해야만 했다. 

 

개인적으로는, 현재 20대의 생각과 처지를 알고 싶다면 기성세대의 논리적인 분석인 ‘90년생이 온다' 같은  책을 이해하는 것보다 이 책을 읽는 게 백 번 낫다고 생각한다. 20대의 공감을 받는 이 책에서는 어떤 감정을 다루고 있는지, 이들이 처한 상황이 어떠한지 사실적으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먼저, 책에서 다루는 ‘현실'이라는 공간은 냉혹하고, 차가우며, 이해타산적이다. 

강남에서 구걸하던 노인이, 한 생명이 변사자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다행히도 타살이나 사고는 아니며, 앞으로 위생관리에 철저하도록 하겠다'고 전하는 뉴스 단신을 소개하는 <아웃포커스>
출근 시간대에 지하철 사고로 청년이 목숨을 잃었지만 사망 사실을 숨기고 운행한 기관사, 그럼에도 시간이 지체된다는 이유로 자신의 출근시간이 늦어진다는 이유로 기관사를 욕하는 시민들. 목숨을 잃은 청년 때문이 아니라 욕하던 출근길 시민들 때문에 트라우마를 얻어 정신과 치료를 받는 기관사의 모습을 담은 <지각출근, 조기퇴근>
‘조율이시'를 외치며 명절 제사를 거르지 않던 할아버지의 별세로 겉치레뿐이던 제사도 더 이상 지내지 않는 집안, 굳이 명절이라 해도 큰집에 모이지 않는 친척들과 그 작태를 욕하는 고모, 명절 아르바이트가 단가가 높다는 이유로 대학교 입학 후 시골에 내려가지 않는 큰형, 그렇게 몇몇 모인 가족들조차 명절 휴무인 가게가 많아서 편의점 커피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모습. 현실과 대비되는 제목 <한가위만 같아라>
취업용 스펙을 쌓기 위해 ‘폐지 줍는 할머니를 위한 리어카를 개발한 사회적 기업’을 창업하고, 기관장 추천을 받아 좋은 기업에 인턴으로 입사한 학생,
청년창업장려 예산의 성과가 필요한 정부기관,
정부예산 수령의 제약조건 때문에 기관장의 추천을 받은 학생을 입사시켜야 하는 유망 스타트업,
정부예산 집행을 위탁받아서 대표 학벌을 따지는 민간 투자기업까지.
모두 각자의 이해관계만을 위해 움직는 모습과
그 이해관계 속에서 잊혀진 ‘폐지 줍는 할머니'의 모습을 대비해 보여주는 <전시상황 대처요령>

 


 

그 현실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모습도 냉혹하다.
상대방을 자기 잣대로 평가하는 데 익숙하고,
못난 상대방을 거리낌없이 깎아내리며 자신을 위안하고,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화부터 내는 등.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기보다는 냉대와 차가운 시선을 주고받는 게 더 익숙하다.

 

면접장에서 내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살아온 노력이 폄하당하기도 하고,
죽어라 좇았던 목표를 성취했다 해도 과연 내가 원한 삶이었는지 회의감이 든다.

 

명문대학교 근처 밥집에서 학생들 밥 먹이는 걸 삶의 낙이라고 자기위안하는 아저씨와,
그곳에서 밥 먹고 나와서는 “저렇게 되기 싫으니 꼭 시험 합격하자”고 말하는 명문대학교 학생들의 모습 <청출어람>
도착시간을 초 단위까지 알려주는 배송서비스에서, 물건이 제시간에 오지 않는다며 택배기사가 농땡이피는 거 아니냐고 화내는 동생. 큰 교통사고로 119에 실려간 택배기사는 안중에도 없이, 자신이 받아야 할 물건을 사고차량 화물칸에 줄 서서 찾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반신불수 진단을 받은 택배기사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는 <총알,배송>

 

어차피 열심히 일해봐야 집 한채도 못 사는 인생이라며 젊음과 낭만이라는 가치를
여행과 인스타그램, 연애라는 본인만의 방식으로 누리지만,
그렇지 않은 친구를 이해하지 못하고 ‘인생을 낭비한다'며 비난하는 사람의 모습 <달팽이>

 


작가는 이들을 비판하지도 않지만, 애정어린 시선을 보내지도 않는다. 그저, 냉혹한 현실에 살아남기 위해 적응한 모습일 뿐이었다. 간혹 사회제도나 특정 사상의 부조리한 점을 꼬집기도 하지만, 통렬한 비판이나 질타를 하지도 않는다. 단지, 이런 삶을 버텨내야 하는 현실이 슬프다는 심정이 곳곳에 보였다. 염세적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무력감이라고 해야 할까.



나도 이묵돌이라는 작가를 좋아해왔고, 전시회도 다녀왔었다. 작가만큼의 고통을 겪었다고 감히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나 역시도 힘든 시간을 살아왔고 살아내고 있으며, 죽음을 고민했고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깊이는 다르더라도, 심연에 있는 사람이라서 덤덤히 내뱉을 수 있는 언어가 좋았다.

 

이묵돌이라는 작가의 콘텐츠에 열광하는 사람이 20대라는 것도 이해가 간다. 가진 수저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격차를 체감할 때 오는 무기력함, 죽어라 공부해서 시험에 합격했다고 해도, “어릴 적 꿈과 희망과는 거리가 먼, 다가올 미래가 정해진 삶”을 내 손으로 선택했다는 데서 오는 허탈감과 상실감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붕어는 붕어고 피라미는 피라미다. 자기 몸집 크기를 알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며 동네 요식업으로 크게 성공했지만, 외식 프랜차이즈의 무분별한 확장 때문에 터전을 잃고 자살한 삼촌의 이야기 <낙수효과> 의 메시지가 남 일 같지 않다.

 

내 환경에서 죽을 만큼 열심히 노력해왔던 결과의 기대치와 대비되는
사회에서의 내 위치와 분수를 깨닫고 납득해야 하는 것도 서러운데,
그 위치와 분수마저도 안정하지는 않다는 가혹한 현실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일관성이라는 게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 수저로부터 나오는 거야. 돈이 없으면 예술이 다 뭐야? 나도 엄마아빠 다 있고, 집안에 돈도 많고 그랬으면 매일 그림 그릴 수 있어. 내가 원하는 그림만 맨날 그리면서, 사람들 반응 같은 거 신경도 안 쓰면서 계속할 수 있었다고. 그런데 현실은 어때? 몇 년이나 쫓던 걸 포기하고 적당한 회사에 디자이너로 취직해 버렸어. 왜? 그렇게라도 안 하면 굶어 죽으니까. 학교랑 다르게 사회는 열심히 한다고 장학금 같은 거 주는 게 아니니까.”

“맞아. 씨발. 나는 원래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니까 그런 거겠지. 그러니까 흙수저로 태어나 평생 흙수저인 거고. 이러다 어떻게 결혼이나 해서, 낳은 애를 키원다고 해도 흙수저로밖에 못 키우겠지. 만약 내 딸이 ‘저는 순수예술을 하고 싶어요' 라고 하면 난 뭐라고 해야 할까? 장기 팔아서라도 돈 대줄 테니까 마음대로 원하는 미술을 하렴. 이럴 수 있을까? 현실을 똑바로 보고, 적당한 곳에 취직이나 하라고 말하지 않을까? 응? 진희야…” -  <인어공주>, 

 

“이러다 나이가 적당히 차면 결혼이나 하겠지. 심심한 마당에 딸 하나 아들 하나 낳겠지. 갈 곳 없이 자식교육에 목매다 부부싸움을 하고, 나보다 어린 애인을 몰래 만나다 걸려 별거라도 하겠지. 그럼 난 매일같이 똑같은 일을 하고, 매달 같은 금액의 양육비를 전처에게 부치고, 가끔 자식들 만나 별 거 아닌 얘기하며 눈물을 쥐어짜고, 정년 되면 은퇴해서 연금이나 받으며 살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화가 치밀었다. 지금까지 내가 보내온 시간이 고작 그 정도 인생을 영위하기 위해 존재했다니. 명문대 합격통지서에 목놓아 울고, 높은 학점으로 장학금도 타고, 첫사랑의 추억이며 군대에서의 삽질, 새벽 고시촌을 누비며 불 켜진 포차집을 찾던 모든 시간이 이 지루한 결말을 위한 과정이었단 걸, 난 도저히 믿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 <닫힌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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