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체에게 “꿈”을 팔고, 꿈꾸고 나서 느낀 감정 일부를 대금으로 받는 꿈 백화점 이야기
꿈 백화점은 ‘현실을 사는 우리가 잠들었을 때 도착하는 곳’이라는 설정이지만, 현실을 사는 우리의 모습과 심경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더 현실감 있는 판타지
“대단한 미래는 없다. 즐거운 현재와 오늘 밤의 꿈이 있을 뿐이다”
꿈.
잠들어 있는 동안, 그들의 그림자가 계속 생각하고 느낄 수 있도록 ‘시간의 신'이 만들어낸 대상. 과거에 얽매여 약해져 있는 사람에게는 용기를, 미래에만 치우쳐 과거를 잊어버리는 경솔한 사람에게는 반추할 시간을 ‘현재'를 살아가는 생명체에게 주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꿈"이라는 시간이 이 세계관에게, 저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책 주인공 ‘페니'가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입사면접에 대답하는 것으로 보여준다. “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달러구트의 질문에 “잠든 시간은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희망에 비하면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시간 같지만, 푹 자고 일어났을 때 현재를 살아갈 용기와 기력을 얻을 수 있게 해 준다. 귀중한 경험을 갈무리하고,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중요한 휴식처다.” 라고 대답한다. “왜 굳이 달러구트에서 일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는 “자극적이고 중독될 수 있는 꿈을 파는 다른 곳들과 달리, 현실을 침범하지 않는 수준의 꿈을 다루기 때문이다. 고객에게 중요한 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달러구트의 의견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라는 대답으로 합격한다.
세계관 안에는 여러 명의 ‘꿈 제작자’가 있다.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일을 꿈으로 만드는 예지몽 제작자 ‘아가냅 코코',
트라우마나 겪고 싶지 않은 꿈을 만드는 ‘막심',
아름다운 꿈 풍경 제작자 ‘와와 슬립랜드',
타인의 인생을 대신 살아볼 수 있는 꿈 제작자 ‘야스누즈 오트라',
동물들이 꾸는 꿈 제작자 ‘애니모라 반쵸', 크리스마스 꿈 선물을 만드는 산타클로스 ‘니콜라스',
그 외에는 하늘을 나는 꿈을 만드는 ‘요정들'과 죽은 자들이 나오는 꿈 제작자 ‘도제'까지.
작가가 보여주는 여러 가지 형태의 꿈은 ‘과거의 경험과 희망의 미래' 라는 꿈의 정의를 충실히 따른다.
예컨대 아가냅 코코의 꿈 제품은 태몽이나 데자뷰의 형태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재생되며, 예지몽의 가격은 ‘설렘’, ‘신기함', ‘호기심' 으로 도착한다. 작중에서 데자뷰는 소재가 없어 고통받던 시나리오 작가가 영감을 받아 신나게 집필하는 원동력이 된다. 다만 주인공 페니가 ‘미래를 내다보는 진짜 예지몽을 연구해 보고 싶다'며 학습열을 불태우자, 달러구트는 ‘대단한 미래는 없다. 즐거운 현재와 오늘 밤의 꿈만 있을 뿐이다' 라고 정리한다.
막심의 꿈은 힘들었던 시절이나 트라우마를 자극하지만, 달러구트는 그런 꿈마저도 ‘가장 힘들었던 시절은, 온 힘을 다해 어려움을 헤쳐나가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을 이겨내고 지금의 위치에 있는 현재의 내가 강하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다'는 가치를 부여한다. 누군가는 결국 꿈을 환불하고 트라우마를 외면하는 선택을 하지만, 누군가는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자신감'과 ‘자부심'을 지불한다.
작중에서 ‘12월에 가장 많이 팔린 꿈’ 베스트셀링 어워드 수상자로 ‘15년 연속 수상자’였던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동물 꿈 제작자였던 ‘애니모라 반쵸'가 선정되는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연말에 바쁜 가족들을 집에서 오후 내내 하염없이 기다리며, 함께 신나게 산책하는 꿈을 꾸는 나이 든 강아지의 모습이 괜시리 안타까웠다. 느지막이 모인 가족들이, 달리기하듯 박자 맞춰 짧은 다리를 허우적거리는 강아지의 모습을 보며 ‘산책 가자'고 깨우는 장면은 그래서 더 따스하게 느껴졌다.
‘타인의 삶’을 사는 꿈은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돌아보게 한다. 특히 타인이 잘나가는 것을 보며 열등감을 느끼거나 질투한다던가, 자신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며 우월감이나 안도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고자 하는 꿈이다. 달러구트는 사람들이 ‘비교’라는 범주에서 벗어나 행복을 찾아갈 때 - 삶에 만족하지 못할 경우에는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더 깨닫기 어려운 경지인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족한다' - 비로소 꿈값이 도착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판타지 소설이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나 묘사는 지극히 현실적이라서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도입부에서부터 ‘취업 준비생'이 공감할 만한 내용인 ‘입사지원서와 면접’이 등장하고, 심지어 면접 질문마저도 ‘지원 동기'와 ‘판매하는 제품에 대한 이해'를 묻는다. ‘꿈은 꿈일 뿐이다'라는 주장에도 수긍해서, 꿈 백화점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자신이 꿈 백화점에서 꿈을 샀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는 설정이 붙어 있다.
현실을 살아가는 소설 속 사람들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판타지 소설인데도 친근하고, 현실감 있게 읽힌다. 지방에서 태어나 대학교를 마치고, 수도권 회사를 다니며 자취하는 4년차 직장인 솔로 여성, 시나리오 공모전을 준비하는 예비 취준생, 전역한 지 7년차인데도 가끔 재입대하는 꿈을 꾸는 남성,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딸을 그리워하는 신혼부부나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손자. ‘미세먼지 최악'을 확인하고 출근하는 모습이나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카라멜 마끼아또를 시키는 모습에서는 수필같은 친숙함이 느껴진다.
세세한 설정에도 나름의 깊이가 있다. 예컨대 ‘타인의 삶을 사는 꿈’을 체험판으로 시판한 것. 타인의 삶을 사는 꿈은 ‘서로 비교하는 삶에서 벗어나 행복을 자력으로 찾아가는 깨달음'을 의도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타인의 삶을 이해하게 되어 역지사지의 태도를 갖춘다고 해도 나와 남을 비교하는 행위를 완전히 멈출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절대적인 행복보다는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니까.
그래서 작중에서 ‘타인의 삶'은 체험판으로 등장한다. 재미있는 절충안이다.
체험판으로 만들어진 꿈이 정말 의도한 효과가 있다면 정식 출시를 고려해보자는 달러구트의 제안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꿈'을 주제로 판타지 세계를 몰입감 있게 풀어낸, 가볍게 읽기 좋은 소설이었다.
꿈을 무의식의 산물이라며, 성적 욕망의 표출이라고 말하는 프로이트의 주장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무슨 꿈이든 성적인 걸로만 해석하는 변태 할아버지처럼 보인다).
‘행복한 하루를 살고, 좋은 꿈 꾸길 바라며’ 여러 꿈 제작자들이 꿈을 만들고, 달러구트 백화점에서 내가 원하는 꿈을 산다는 판타지 세계가 있었으면 좋겠다.
'세줄요약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글은 어떻게 일하는가 (0) | 2021.12.04 |
---|---|
Do it! 타입스크립트 프로그래밍 (0) | 2021.05.06 |
알랭 드 보통 - 관계 (0) | 2021.04.02 |
시간과 장의사 (0) | 2021.02.26 |
컴퓨터과학이 여는 세계 (0) | 2021.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