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란 ‘타인이 가치 있게 여기는 자원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으로, 누군가의 소유물이나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객체와 객체 사이의 역학관계'를 의미한다.
권력은 ‘견제와 책임’이 정상적으로 동작해야 불편부당하게 쓰일 수 있으며, 공평한 분배가 필요하다고 설파한다. 기업 경영진은 권력을 노동자에게도 분배해야 하고, 국가 권력은 언론과 시민의 견제가 필요하다는 식이다.
권력의 특징 분석은 그런대로 합리적이지만, 저자가 주장한 ‘권력의 통제 방법’은 근거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권력을 ‘분배'하면 견제된다는 논리에 수긍할 수 없다.
‘힘과 권력’이라는 단어는 사회에서 일종의 암묵지로 쓰인다. 굳이 의미를 정의하지 않아도, 대충 어떤 뜻이겠거니 각자의 교육과 경험으로 해석할 수 있는 종류의 단어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자신이 배우고 경험한 것을 ‘권력'이라고 학습한다. 그러고는, 본인이 경험으로 이해한 ‘그 단어의 뭔가 두루뭉술한 느낌'을 다른 사람도 비슷하게 이해했을 거라고 넘겨짚는다. 수많은 소통 오류가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데, ‘권력’도 그런 종류의 단어 중 하나다.
이 책은 ‘권력이 무엇이고 / 어떤 특징이 있으며 / 사람들은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가’ 를 꽤 잘 정리했다.
먼저 저자는 ‘힘'은 “타인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이며,
권력을 ‘상대방이 가치 있게 여기는 모든 형태의 자원을 통제할 수 있는 힘" 으로 정의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가치 있게 여기는 근원적인 요소인 안전, 자존감의 욕구 를 통제할 수 있을 때 ‘권력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안전은 음식 / 피난처 등 생리적인 욕구, 위협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관계 또는 대처할 수 있는 능력 등을 포함하며, 자존감이란 ‘나의 능력, 사회적 위치와 영향력, 도덕적인 올바름 등을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따라 좌우된다. 구체적인 단어로 표현하자면 돈, 지위, 소속감, 성취감, 자율성, 도덕성 등이 포함된다. 또한, 어떤 요소에 얼마의 가중치를 부여하는지, 어떤 자원을 어떤 형태로 제공했을 때 가치 있게 느끼는지는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힘과 권력을 둘러싼 오해 몇 가지도 정정한다. 예컨대 ‘지위를 가진 사람에게 권력이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경우가 더 많다. 예컨대 기업 조직도에서 상위에 위치한 사람은 하위조직에게 의사결정을 지시할 수 있지만, 기업이 ‘가치 있게 여기는 자원'의 실질적인 통제 권한이 하위조직에 있다면 사실상 실권은 하위조직이 쥐는 셈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돈 버는 게 목적인 기업에서 돈 잘 벌어다주는 조직 또는 실무자는, 기업이 가치있게 여기는 ‘돈'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목소리가 큰 것과 마찬가지다. 그 조직이나 실무자가 조직도 어디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관계에서 오는 힘' 이고, 관계는 소유대상 또는 독점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권력은 특정 개인의 소유물 또는 집단의 전유물일 수 없다. 그럼에도 특정 집단에게 권력이 축적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뭘까? 저자는 권력계층이 ‘권위'와 ‘내러티브(서사)’를 내세워 자신을 정당화하고, 한 번 질서가 형성되면 권력이 없는 계층이 이걸 ‘자연질서'라고 자기충족적 예언을 하면서 현실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고정관념이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하는 식이다.
예컨대 기존 권력집단이 특정 집단을 권력 대상에서 배제하는 차별적 접근을 시행하면, 집단 구성원이 무의식적으로 체제를 공고히 하는 쪽으로 수렴진화한다는 식이다. 저자는 전근대 사회의 권력체제에서 남성이 여성을 배격했으며, 여성집단은 권력체제에 접근하지 못하는 대우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행동을 조정했다고 한다. 우생학의 경우 그릇된 과학적 근거를 권력유지와 체제 정당화에 활용한 사례이지만, 지금도 ‘빈곤층은 게으르고 똑똑하지 못해서 가난하다'는 고정관념의 편린으로 남아 있다는 식이다.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또 다른 내러티브(서사)로 ‘능력주의'를 꼽는다. 가장 능력있고 성실한 사람에게 자원이 축적되는 것이며,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능력이 부족하고 성실하지 못해서라는 고정관념이 부지불식간에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가난은 ‘지능이나 능력의 부족'보다는 자원의 불평등한 배분이 더 큰 지분을 차지함에도, 능력주의를 토대로 계층이 분리되었을 때 권력 상층부는 ‘자신이 상층에 있는 이유'를 내러티브로 전파하며 자신의 위치를 정당화하고, 권력 하층부는 내러티브에 맞춰 자신의 생각을 조정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공고해 보이는 권력체계임에도, 권력을 보유한 주인은 게속 바뀌었다. 기존 권력집단에 힘이 과하게 집중되며 견제와 책임이 사라지는 고착화 정도가 심할 때, 또는 권력집단이 독점한 자원의 중요도를 뒤바꾸는 기술의 발전이 있을 때 변화의 저변이 마련된다. 저자는 전자의 예시를 위해 수많은 사회운동 - 아르헨티나의 동성애 합법화 법안, 학생들의 주도로 일어난 기후변화를 위한 결석 시위 등 - 을 근거로 ‘세 가지 요소'가 합쳐졌을 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강조한다.
- 선동: 개인이나 집단의 불만을 식별해서 대중에게 선포한다. 대중을 분개하게 하고,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발화점을 만들어낸다.
- 혁신: 불만을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 통합: 의견을 조율하고, 혁신가의 해결책이 대규모로 수용될 수 있도록 조율한다.
세 가지가 전부 효과적으로 전개됐으며, ‘공유된 의제'를 위해 모든 참여자가 협력했던 사회운동만 성공했다고 한다. 가치 있는 자원에 접근할 수 없는 집단이 어떤 발상과 행동으로 대규모 행동과 실제 변화를 가져왔는지, 세 가지 요소를 어떤 방식으로 효과적으로 전개한 방법은 책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이 부분은 각 사례마다 가치있게 여기던 자원의 특징이 다르고, 개선하고자 하는 기존 권력집단의 특징이 다 달라서 일반화할 수 있는 원칙이나 예시를 글로 쓰기가 힘들다. 그나마 언급할 만한 점은 ‘SNS는 같은 생각을 하는 집단 위주로 의견이 전파된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불만을 선포하는 선동에는 효과적이지만, 혁신 / 통합 단계로 나아가는 게 일반적으로는 쉽지 않다'고 한 것 정도.)
저자는 기술의 관점에서 현 시점 가장 강력한 ‘권력집단'으로 빅테크 기업을 지목한다.
- 권력의 근간으로 맨 처음 언급했던 ‘사람이 어떤 자원을 가치 있게 여기는가'라는 일종의 개인정보를 역사상 그 어느 권력집단보다 잘 알고 있다는 점
- 자원의 통제 방법이 그 어느 권력집단보다 정교하며 일방적이라는 점
- 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방책을 도입하기 어렵다는 점을 꼽았다.
특히 자원의 통제 방식으로 빅테크 기업이 만들어낸 알고리즘을 법으로 규제하겠다는 방식의 두 가지 문제점을 꼽는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알고리즘을 일시적으로 고정하는 후행조치에 불과하다는 점, 알고리즘의 책임 주체를 명확히 정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결국 권력을 통제하고 견제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더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결론을 맺는다. 올바른 교육도 중요하고 언론의 역할도 중요하다.
이 책의 절반은 ‘권력 특성 이해와 분석'이고, 나머지 절반이 ‘권력 견제와 통제'다. 그런데 견제와 통제 부분에서는 ‘스스로 원하는 게 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비판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같은 뻔한 주장 말고는 그다지 참신하거나 설득력 있는 내용이 없었다.
빅테크 기업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저자는 ‘노동조합'을 고평가한다. 구글 내부 엔지니어가 기술기업의 비도덕적인 행동을 어떻게 견제했는지 소개하고, 구글 노조가 출범하면서 ‘연대와 민주주의, 사회경제적 정의를 장려한다'는 기치를 내세웠다는 사례를 제시한다. 나아가서 경영진 / 주주로 이루어져 있는 기업경영권이라는 권력을 노동자 대표에게도 분배하자는 식의 주장도 소개한다.
이 책의 저자가 자주 쓰는 단어 중 하나가 ‘공평'과 ‘분배'다. 내가 번역서를 읽은 거라서 원래 단어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놀랍게도 이 책에서는 정작 “권력을 ‘공평'하게 ‘분배'하면 어떻게 권력의 집중화를 견제할 수 있고 권력이 올바르게 쓰일 수 있는지“는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고대 아테네에서 시작되어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이 된 삼권분립은 ‘특정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다른 종류의 권력을 분리해서 권력주체의 균형을 맞춘다' 라는 철학에 기반해 있다. 이게 ‘공평'한 ‘분배'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공평하게 나누었다'는 단어는 ‘행사할 수 있는 특질과 성격은 동일하고, 행사 가능한 대상을 여럿으로 확장했다' 는 맥락으로 읽힌다. 다른 종류의 해석은 이 책에서 볼 수 없었다. 역사적으로도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맞추어서 오랜 시간 체제를 유지해온 경우는 많지만, 권력의 ‘공평한 분배'가 오래 유지된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세 명의 집정관에게 권력을 분배했던 로마의 삼두정치가 얼마나 갔나?
구글 노조가 사회적 가치를 내세웠다고 해도, 노동조합은 엄연히 구성원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익집단이다. 기업 경영진을 견제할 수도 있으나, 구성원의 이익을 위해서 얼마든지 기업의 경영방침에 협력할 수도 있다. 빅테크 기업을 견제할 수단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사회적 가치를 표방한 노동조합이 반가울 수는 있겠지만, 노동조합이 기업을 반드시 견제하기만 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글을 쓴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근거가 부실했다.
또한 조직이 여성이나 소수집단을 조직에 포용하며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곳곳에서 펴는데, 도덕적으로 올바르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식의 논리가 곳곳에서 등장한다. 저자 본인 생각으로는 도덕적으로 올바르니까 당연하다고 주장할 수 있으나, 기업 인사담당자가 이 논리만 보고 조직 내 다양성을 높이겠다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기존의 권력계층이 고착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조직 내에 여성 또는 소수민족이 일정 비율은 있어야 한다'는 식의 기계적 평등의 허점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어떤 조건에서도’ 다양성은 올바른 선택이며, 권력의 견제와 균형에 이바지할 것이라는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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