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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줄요약 독서

지금 여기, 무탈한가요?

inspirit941 2023. 9. 9.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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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근거와 논리 없이, 감성에만 의존한 채 사회문제를 비판하는 책
주장의 도덕적 우월함을 무기로, 자신과 대립하는 의견의 배경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는다.
놀랍도록 시대착오적이고, 사고의 깊이가 없다.

 
약자가 더 고통받지 않도록, 불공정한 상황이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도록 한국 사회의 몇 가지 문제점을 발의하는 정도의 책이다. 딱 ‘발의'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며, 저자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기 위한 구체적인 근거나 이성적인 논리는 전혀 없다. 하나의 주제에서도 의도적으로 논점을 흐리는 식의 전개가 많이 보인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책임하게 글을 썼나 싶을 정도.

 


예컨대 한국의 ‘교육’ 문제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크게 두 가지다.


1. 누군가의 학력으로 그 사람의 인생을 재단하려는 불합리한 사회,
2. 공부의 격차가 빈부격차로 이어지는 사회문제.
누군가가 저학력이라고 해서 게으르고 끈기가 없다, 노력하지 않았다고 평가하는 것은 당연히 잘못되었다. 학력이 그 사람의 성향이나 인품을 평가할 만한 도구로 쓰기엔 적절하지 않은 지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1번 문제를 비판하면서 2번 논제도 은글슬쩍 같은 선상에 놓고 둘다 ‘해결해야 할 문제'로 정의해 버린다. 자본주의 구조에서 ‘교육’에만 집중해 빈부격차를 이해한다면 시장에서 더 높은 가치를 쳐 주는 기술, 지식을 교육받고 공부한 사람이 인력시장에서 더 많은 돈을 받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설령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는 기술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즉 자본주의에서 더 많은 돈이 오고가는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보상에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건 공부 방향의 문제일 뿐, 공부의 격차는 큰 관계가 없다. 역으로 공부를 많이 했더라도, 그 지식과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시장의 크기가 작다면 보상에 한계가 있는 셈이다.
 
 
저자는 ‘공부의 결과가 직업의 차이로 이어지는 것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영역이다. 하지만 공부의 차이가 빈부의 차이를 정당화해도 되는지는 다른 문제다'라며 공부의 격차가 빈부격차로 이어지는 사회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이유로 ‘소득격차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양극화 현상을 내버려두자는 태도는 잔인하다' 라는 근거를 댄다. 다른 논리는 없다.
 
소득격차가 납득할 수 없는 수준으로 벌어진 것이 정말 ‘공부의 격차'를 해소하면 해결되나? 빈부격차를 완화할 수 있는 제도가 제 기능을 못한 것이 아니라, 공부 많이 한 사람이 전부 다 가져가서인가? 그렇다면 한국의 빈부격차를 학력으로 분류하면 석박사급 고학력자가 최상위에 분포해 있다는 근거가 있나?
 
시장이 평가한 기술과 지식의 가치에 차이가 있는 것을 ‘잔인하다'는 이유만으로 교정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잔인하다는 평가는 저자 개인의 주관으로 보이는데, 사회적으로도 합의된 평가인가? 잔인하다는 감성적 평가 하나만으로 기존 시스템을 변경했을 때의 파급효과는 생각해 봤나? 이 책은 그 어떤 것도 대답하지 못한다. 그걸 생각하고 쓰지 않았으니까.
 


 
‘난민' 문제에서 저자는 한국 사회의 난민 편견과 혐오정서를 비판하며,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3.7%로 OECD 평균인 37%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난민 인정률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 난민에 대한 편견이 좋지 않은 것 자체는 사실이다. 우리가 난민을 수용해야 한다는 근거가 논리적이고 충분하다면, 편견을 거두고 생각을 바꿔보자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난민을 수용해야 하는 이유로 “‘우리 국민이 더 소중하다'는 식의 논리는 이미 지났고, 기후환경 해결책 모색하듯 난민 문제도 지구촌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하며, OECD 10위권 국가인 한국의 국격 향상을 위해서” 라는 근거를 댄다. 이마저도 'OECD 평균을 우리가 왜 추종해야 하는가' 라는 근거는 없다. 한국의 지리적, 문화적 환경에 대한 고찰도 없다.
 
우리 국민이 더 소중하다는 논리가 지났다는 근거는 어디 있나? 물론 이 책이 2020년에 쓰였긴 하지만, 그 때도 미국의 트럼프 정권은 멕시코 사이에 국경 장벽을 세웠다. 바이든 정권은 IRA를 승인했고, 미중 무역갈등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국경 없는 자유무역주의의 가치가 흔들리는 모습이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다. 자국민 중심 정책이 대중의 표를 얻고 정책으로 연결되는 상황에서 '우리 국민이 소중하다는 논리가 지났다'는 근거는 어디 있나?
 
기후환경과 난민 문제를 동일한 수준의 가치로 평가한 것 같은데, 천부인권이라는 도덕적 억제기를 내려놓고 생각하면 두 문제는 같은 가치로 평가받을 수가 없다. 기후환경은 우리 모두가 영향을 받는 문제라서 나의 생존을 위해 외면할 수 없지만, 난민 문제는 나의 생존을 위해 외면할 수 있다는 선택지가 있기 때문이다. 천부인권이라는 도덕적 잣대로 죄책감을 유도할 수는 있으나, 죄책감을 감내하겠다는 선택을 할 경우 현실적으로 제약할 방법이 없다.
 
자국 중심주의가 떠오르는 상황에서도 지구촌이라는 실체 없는 가치를 근거로 드는 부분은 시대착오적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지구촌이라는 단어 자체가 냉전 종식기에 세계평화가 올 것이라는 낙관적 희망에 기대 만들어졌던 단어고, 1980 ~ 2000년대 정도에나 낙관론에 기초해 쓰였던 단어다. 국격 운운하는 것도 한국이 중진국 후반에서 선진국 초입이던 1980년대 ~ 2000년대 정도에나 남발하던 용어로, 2020년대 한국사회에서 명확한 근거와 가치판단 없이 그저 국격을 위해 정책 수립하자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저자는 난민이 일으키는 사회범죄가 더 많다는 것은 편견으로, 인구 증가에 따라 통계학적으로 발생하는 범죄의 증가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가 긍정적으로 평가한 유럽의 난민 수용 정책조차 끝없이 밀려드는 난민의 수 증가, 자국민이 휘말리는 범죄 등 문제가 발생하면서 자국민에게 비판을 받았다. 한국에서도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근거로도 유럽의 태도 변화를 꼽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 대한 반론이나 비판은 글에서 딱히 찾아볼 수가 없다.
 
난민을 더 많이 받자고 주장할 생각이었으면 한국의 난민 공포증이나 편견이 왜 실체가 없는지를 명명백백히 밝히거나, 난민을 수용했을 때의 경제적 / 인구통계학적 효과를 설명하는 게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이성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논거를 가지고 글을 전개했다면 이렇게 맥 빠지는 주장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외에도 이 책은 전반적으로 ‘감성에 기반한 주장'에서 끝나는 내용이 너무 많다. 장애인의 인권과 이동권을 보장해야 하는 근거로 출퇴근길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수치심을 느낀다는 ‘김인한 씨' 사례를 언급한다거나, 플랫폼 노동자의 처우 개선이 필요하다는 근거로 영화 <미안해요, 리키> 주인공을 소개한다거나. 페미니즘 주제에서는 저출산으로 현실화되는 군 병력 공백의 해소 방안으로 여성징병제를 논하는 사람들에게  '남성의 피해의식을 여성에게 전가하지 말라', '분노의 방향은 여성이 아니라 사회여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편다. 뭐가 피해의식이라는 건지, 분노의 방향이 사회여야 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소외된 사람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신파극처럼 보여주면서 도덕적인 우월감으로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형태의 논리가 관통한다. 저자의 주장에 대립되는 의견의 논지를 이해하기는커녕 소개조차 하지 않으며, 현상의 원인을 철저히 분석하지도 않고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한다.
참고 읽느라 너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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